[황진이 콤플렉스⑨]'황진이 야동'의 주인공, 지족선사와의 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선전관 이사종(李士宗) 또한 소문난 가수였다. 그와 진이는 천수원 냇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사종은 공무로 송도에 왔는데 말을 매어놓고 관을 벗어서 배 위에 올려놓은 채 누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황진이가 지나가다가 그 소리를 들었는데, 깜짝 놀라서 말을 천수원 역에 매어놓고 숨어서는 오랫 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종자에게 말했다.
“노래가 이상스럽지 않은가. 여기서 볼 수 있는 보통 가객이 아니다. 내 들으니 도성에 풍류객 이사종이라는 사람이 있어 당대의 절창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그 사람이 틀림없다.”
노래가 끝나자 종자가 달려가 그에게 물었더니 과연 이사종이라고 한다. 진이는 그를 집으로 모셔와서 며칠을 같이 지낸다. 몇 년 전 이언방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회가 밀려왔다. 노래가 통하는 것은 피가 통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그녀는 정말 이 남자와 살고싶어졌다. 소세양의 제안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해보자.
“나으리와 딱 6년만 같이 살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하필 6년인가?”
“3년은 저의 사랑으로 살고 3년은 나으리의 사랑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미 관기를 벗어났고 재물도 많이 모았던 진이는 가재도구와 3년간 먹고 쓸 것들을 모두 싸서 이사종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삼년 동안 이사종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두 집 살림을 꾸려나간다. 그리고 3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이사종이 황진이를 먹여 살린다. 6년이 지났을 때 황진이는 서슴없이 자리를 털고 송도로 돌아온다.
이 놀라운 계약 동거는 유몽인의 에 나오는 이야기다. 작가 김탁환은 30일이니 6년이니 하는 동거 게임이 한낱 흥밋거리로 인생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숫자놀음이라고 판단했는지, 황진이의 입을 빌어 그런 계약을 한 적이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기간을 정해놓고 동거를 하는 황진이의 태도에는 인생의 주체적으로 경영하려는 결연한 자세같은 것이 엿보인다. 남자의 구애에 휘둘리는 삶도 싫었고, 남자의 사랑에 기탁하여 생의 위로를 받는 일은 더더욱 싫었다.
그녀는 예쁜 여자로 사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생을 살고싶어했다. 소세양이 계약 동거를 제의한 것은, 기생과 여성을 얕잡아보는 당시의 남성적 관점이 작동을 한 것이지만, 황진이가 그것에 대해 흔쾌의 동의한 것과 또 이사종과의 계약 동거를 제의하고 실천한 것은 육체와 여성과 제도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나름의 전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황진이의 명성을 드높인 두 남자를 만날 때가 되었다. ‘성옹지소록’(허균)에는 황진이가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인용문 하나가 있다.
“지족 노선사가 삼십 년 동안 면벽했지만 내게 짓밟힌 바 되었다. 오직 화담 선생만은 접근하기를 여러 해에 걸쳤지만 종시 어지럽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이다.”
이 말이 후세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두 사람을 유혹하는 ‘황진이 야동’을 양산하게 했다. 황진이의 말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 바람에, 이야기가 부풀려지면 질 수록 지족선사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고 서경덕은 성인에 가까워졌다. 김탁환은 지족선사가 천하의 위선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는지 그의 위신을 찾아주기로 작심한 듯 다른 관점을 시도한다. 그 부분을 살펴보자.
지족선사는 삼십 년 면벽수행의 고집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친절한 분이었지요. (......) 사흘을 그곳에서 묵었지요. 지족선사와 나눈 말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떠오르는 풍경은 하나 있습니다. 둘째 날 오후부터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지족선사는 손수 푸르게 피어나는 안개와도 같은 차를 끓였지요. 솔잎차를 앞에 놓고 빗방울에 빗대어 서로의 마음을 떠보았답니다. 불제자는 빗방울로부터 벗어나려 했고 나는 그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으려 들었지요. 빗방울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에 사로잡힌다고 하기에 빗방울 하나도 잡지 못하는 이가 어찌 억겁의 연을 끊을 수 있겠느냐고 따졌답니다. 지족선사는 찻잔의 떨림을 조용히 응시하며 말을 아꼈지요. 깨달음이 아무리 깊다 한들 도의 문을 밀고 들어올 중생이 진흙에 코를 박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더 날카롭게 다가섰답니다. 욕심이 크면 집착이 두터운 법인가요. 설령 떼어내기 힘든 집착이라 하더라도 그 욕심을 만들어낸 먼지와 티끌을 쓸어내야 맑고 깨끗해지지 않겠습니까. 지족선사는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갈 마음 뿐이었고 황모(황진이)는 날아오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땅바닥을 배로 밀며 기어다니는 이들의 눈물과 한숨을 사 년 동안의 유랑에서 직접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지족사의 풍광을 부슬부슬 쓰다듬는 가랑비가 누군가의 숨통을 턱턱 막을 수도 있지요. 대사님은 틀림없이 더 큰 도를 깨우쳐 더 높이 오르시겠지만 자비로운 걸음에 밟혀 피를 토하는 미물은 어쩌시렵니까. 지족선사는 결국 마음 바닥의 그림자를 드러냈습니다. 이 작은 절이 움직인다 하여 세상이 달라지겠소이까. 김탁환의 '나, 황진이'(2006)에서 인용.
황진이의 고백체로 되어 있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리송하다. 결국 마음 바닥의 그림자를 드러냈다는 그 말이, 파계를 의미하는 것이던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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