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경의 Shall We drink] <18> 천사도 탐내는 스카치위스키








스코틀랜드 행 영국항공 비행기 안,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앤젤스 셰어(Angel's Share): 천사를 위한 위스키’가 눈길을 끌었다. 위스키의 나라로 가는 하늘 위에서 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주인공 로비는 약물과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고만 치다가 법정에서 사회봉사 300시간을 선고 받는다. 사회봉사 첫날, 여자친구의 출산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그녀의 가족들에게 쫓겨나고 만다. 로비를 위로해주는 이는 사회봉사 교육관 해리다. 그는 아끼던 위스키 스프링뱅크 32년산을 꺼내온다. 한 아이의 삶이 시작된 순간, 싱글몰트위스키로 축배를 든다.
그날 이후 로비는 해리를 따라 증류소와 시음회를 다니며 위스키 감별에 남다른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된다. 로비가 우연히 발견한 재능으로 인생 역전 계획을 세우며 영화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예측불허의 감동을 안겨준다.
사실 ‘앤젤스 셰어’는 예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와 함께 전해오는 이야기다. 위스키는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동안 매해 2%씩 증발하는데, 이걸 '천사의 몫'이라 부른다. 낭만적 반전이 있는 영화와 잘 어울리는 말이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증류소에서 위스키를 맛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정말 천사의 주량은 오크통의 2%일까. 저 구름 너머 스코틀랜드에 대한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틀 뒤, 나는 거짓말처럼 영화에 나온 ‘글렌고인 증류소(Glengoyne Distillery)’ 앞에 서 있었다. 우연히 본 영화 속 장소에 오게 된 것도, 눈에 익은 풍경도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스카치위스키(Scotch Whisky)의 산지는 하이랜드, 로우랜드, 아일라, 캠벨타운, 스페이사이드 5곳으로 나뉜다. 글레고인은 하이랜드와 로우랜드의 경계에 있는 작은 증류소로, 1833년 조지 코넬이 설립한 이래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만들어 왔다.
스카치위스키는 오직 보리만 사용하는 ‘몰트위스키’, 보리와 다른 곡물을 배합해 증류한 ‘그레인위스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혼합한 ‘블렌디드위스키’로 분류한다. 몰트위스키 중에서도 한 증류소에서 만든 원액을 담은 위스키를 ‘싱글 몰트 위스키’라 부른다.
증류소 견학을 맡은 헬렌은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인 ‘킬트 스커트’ 차림이었다. 그녀는 한때 위스키를 만드는 물로 쓰던 폭포부터 보여주겠다고 했다. 폭포 주변에는 연보라색 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꽃 향기를 머금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글렌고인(Glengoyne)은 예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쓰던 게일어(The Gaelic language)로, ‘글렌’은 계곡, ‘고인’은 거위를 뜻한단다. ‘글렌’으로 시작하는 스카치위스키 이름이 많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 설명을 마친 헬렌은 환영주로 글렌고인 12년산을 권했다. 그녀가 건네 준 잔에서 과일 향이 피어올랐다. 목 넘김은 산뜻했고, 끝 맛은 향긋했다. 귓가에는 폭포 물 흐르는 소리와 새 소리가 들렸다.
“자, 지금부터 글렌고인의 싱글 몰트 위스키는 어떻게 다른지 보여줄게요.”
몰팅(Malting), 매싱(Mashing), 발효(Fermentation), 증류(Distillation), 숙성(Maturation). 헬렌을 따라 증류소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위스키 제조 과정 5단계를 차례로 살펴봤다. 1시간 만에 다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위스키를 대하는 글렌고인 증류소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증류소의 심장이라 불리는 증류실에서는 글렌고인의 철학, ‘느림의 미학(Keep it nice and slow)’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1차 증류 시간은 짧지만, 2차 증류에선 5ℓ를 3시간에서 3시간 반에 걸쳐 느리게 추출한다. 긴 증류 시간을 통해 발효 시 형성된 과일 향이 원액에 더욱 깊이 스며드는 것이다.
위스키가 숙성 중인 오크통 앞에서 ‘앤젤스 셰어’에 대해 설명하는 헬렌의 모습은 영화 장면과 흡사했다. ‘해마다 전체 술의 2%가 소실되죠. 증발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그걸 천사의 몫이라고 불러요.’
지금도 천사에게 몫을 내주고 있는 오크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오크통에서 수십 년의 드라마를 품은 위스키가 깨어나겠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맛보는 싱글 몰트 위스키에는 얼음을 섞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구나. 앞으로 물 한 방울 톡 떨어뜨려 향을 활짝 깨우는 행동 외에는 무례를 범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위스키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면 위스키를 감별하는 내 미각과 후각도 깨어나지 않을까 기대를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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