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문혁 50년, 미완의 인터뷰

예영준 2016. 5. 3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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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이제 나는 더 이상 박물관 운영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꽤 오랫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아 현재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묻지 마세요.”

청력이 떨어지는 팔순 노인과 전화로 대화를 이어나가기란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찾아가면 만나 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거동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결국 취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펑치안(彭啓安·84)을 만나고자 한 건 문화대혁명 50주년 기획기사를 준비하면서였다. 그가 세운 문혁박물관을 관람하고 문혁이 오늘의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남긴 유산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광둥성 산터우(汕頭)시에서 부시장을 지내고 물러난 펑은 2003년 어느 날 지역 관광지인 타산(塔山) 기슭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봉분 70여 기가 흩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문혁 희생자들의 무덤이었다. 중국에서 가장 외딴 지방인 산터우까지 문혁의 광풍이 불어닥쳤던 것이다.

그 자신 문혁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현(縣) 부서기였던 그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려 셀 수 없이 ‘비판투쟁’장에 불려나가 조리돌림을 당했다. 사재를 털고 지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중국 유일의 문혁박물관을 짓기까지 마음 한편엔 살아남은 자의 부채(負債) 의식이 있었다. 그는 당시의 비극을 되새겨주는 자료 전시관과 함께 위령탑과 비석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 왔다.

그런데 최근 건강 때문에 운영·관리를 지방 정부로 넘긴 사이 박물관은 제 모습을 잃고 말았다. 박물관 외벽에는 차단막이 쳐졌고 입구의 패루와 위령비는 ‘중국의 꿈(中國夢)’과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선전하는 포스터로 가려졌다. 10여 년간 아무 탈 없이 운영되던 박물관을 폐쇄하는 ‘자폐 현상’이 문혁 50주년에 일어난 현실이다.

인민일보는 “문혁 청산은 1980년대에 이미 끝났다”는 요지의 논평을 한 차례 싣고는 내내 침묵했다. 공산당의 공식 결의문에 의해 평가가 확정된 과거사를 더 이상 들춰내지 말라는 다그침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공산당은 문혁에 불편해한다는 방증이다. 그 불편함이야말로 역사 청산이 온전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지금도 문혁 연구는 금기다.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은 건 사람의 본능이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는 법이다. 문혁이란 중국 공산당에 바로 그런 존재다. 더구나 그건 영원히 망각될 수 없는 집단의 기억이다. 아픈 기억을 되새겨서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게 그나마 고통을 줄이는 길이다. 영광의 기억뿐 아니라 통한의 기억까지 역사에 기록하는 이유다.

펑은 전화 질문의 대부분에 답변을 회피했지만 박물관을 세운 까닭을 묻는 질문만큼은 분명하게 답했다. “역사를 거울로 삼아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사위감(以史爲鑑)’. 그 어느 누구보다 중국 지도자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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