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그 끔찍한 범죄 시그널을 놓친 우리 사회

![강남역 10번 출구 벽을 가득 채운 쪽지들. 23일 대부분 서울시청 등으로 옮겨졌다. [사진 신인섭 기자]](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05/25/joongang/20160525012204044tjkl.jpg)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출입구 유리벽을 가득 메운 1000여 장의 메모지를 보던 중 한 메모지에 시선이 고정됐다. 닷새 전 인근 노래방 건물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묻지마 살인’의 희생자가 된 데 따른 공포감을 빗댄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는 운이 없어서 희생당한 것일까. 경찰의 22일 중간수사 결과 발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답이 거기에 있다. 우리 사회가 그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범죄의 시그널’이 여러 차례 전송됐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피의자 김모(34)씨가 처음 조현병(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건 2008년이었다. 이듬해 그는 한 나이트클럽에서 다른 사람의 가방을 훔쳐 달아나다 폭력을 휘두른 혐의(준강도)로 경찰에 입건됐다. 그에겐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다른 조치는 없었다.
또 경찰은 “김씨가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을 키우기 시작한 2014년 이전에도 어머니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며 거친 말과 욕설을 했다. 집 근처 이웃집 대문을 부수는 등 이상행동도 보였다”고 발표했다.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치료를 받게 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사건 이후 여론이 들끓자 정부와 정치권은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법무부는 23일 “정신질환자의 강력 범죄는 경미한 범법행위에서 시작된다. 앞으로 경미한 범죄에도 치료명령과 보호관찰을 명하는 ‘치료명령제’를 오는 12월부터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만약 이 대책이 몇 년만 빨리 시행됐다면 김씨는 준강도 사건 직후 치료와 감독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경찰은 정신질환으로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사람을 지방자치단체장의 허가를 받아 강제 입원시키는 ‘행정 입원’ 조치도 적극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씨는 범행 직전 몇 달간 약을 복용하지 않아 증세가 악화된 상태였다. 다른 조현병 환자들과 달리 부모에게 폭력적 행동과 언사를 보인 김씨를 누군가 미리 발견해 치료받게 했다면 비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정황들만으로 김씨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건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다. 분명한 건 그가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고, 여러 차례 주변에 범죄 시그널을 보냈다는 점이다. 수사기관이나 주변 이웃들이 그 시그널을 놓치지 않았다면 상황은 해피엔딩이었을 수도 있다.
더 이상 한 사람의 생명을 ‘운에 맡긴 채’ 사고가 터지면 사후약방문으로 대책을 쏟아내는 일을 반복해선 안 된다. 비극이 생기기 전에 안전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 운에만 맡겨두기에 생명은 너무나 소중하다.
글=윤정민 사회부문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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