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이순신, 북한의 리순신
[오마이뉴스김경준 기자]
▲ 한산도 제승당 충무공 영정 한산도 제승당에 봉안된 충무공 영정 (정형모 화백) |
북한의 영웅 '리순신'
북한에서도 충무공 탄신일을 따로 기린다는 이야기는 없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 주석 외에 다른 우상에 대한 숭배를 철저하게 금지하고 탄압하는 북한 사회의 특성상, 아무리 충무공과 같은 역사 속 위대한 위인이라고 할지라도, 설 자리가 없다는 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북한에서 충무공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북한에서도 충무공에 대해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조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으로 가르치고 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3일에는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해군 군관들에게 수여하기 위해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을 제정해 수여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정부가 수립된 후, 충무공에 대한 초창기 인식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이러한 인식을 심어준 데에는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 주석의 역할이 매우 컸다. 김 주석이 남긴 충무공에 대한 언급은, 충무공에 대한 대우의 격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김 주석은 1960년대 출판된 <임진조국전쟁 시기 우리 수군의 투쟁>에서 아래와 같은 교시를 내려 충무공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있다.
"외국 략탈자들로부터 우리 조국을 용감하게 수호한 … 리순신 장군들과 같은 우리 선조들의 영예로운 업적과 용감성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이 신성한 투쟁에서 우리의 인민군 장병들과 전체 인민들을 영웅적 위훈에로 고무 격려할 것입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바다를 개척하고 바다 우에서 용감히 싸운 사실들이 많습니다. 리순신 장군은 다른 나라에서 만들지 못한 거북선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기여든 왜적을 바다 우에서 물리쳤습니다. 오직 부패한 봉건 통치 하에서 풍월이나 읊고 술이나 마시면서 부화한 생활을 한 지배 계급들만이 바다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우리 인민은 과거로부터 항상 바다를 사랑하며 … 사람들의 건강도 더욱 증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일성 장군에 밀려난 리순신 장군
그러나 북한 사회의 충무공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1967년을 기점으로 반전된다. 1967년, 김일성 유일 영도체제를 뒷받침해주는 '주체사상'이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를 감히 영웅으로 부각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충무공에 대해 칭송하다시피 했던 김일성 주석 역시 주체사상을 확립시키는 과정에서 충무공에 대해 전과는 180도 다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1967년 <김일성저작집(21)>에는 아래와 같은 김 주석의 충무공 폄하 발언이 실려있다.
"지금 일꾼들은 마치도 리순신 장군을 우리 시대의 영웅보다 더 나은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려 하고 있다. 조국해방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는 리순신보다 나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 일꾼들은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도 리순신 장군만 자꾸 내세우고 있다."
이듬 해에 출판된 <김일성저작집(22)>에서도 충무공에 대한 폄하 발언이 이어진다.
"리순신 장군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고 그를 덮어 내세운다면 양반영웅이나 출세주의를 선전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리순신 같은 옛날 사람들보다도 오늘 우리 사회에서 산 모범으로 될 수 있는 영웅적 인물들을 내세워 공산주의 교양에 많이 이용하여야 한다."
김 주석을 유일지도자로 떠받드는 주체사상이 북한사회를 이끄는 지도이념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면서,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도 '인민대중'이 주체가 되는 '주체사관'이라는 사관으로 역사를 다시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관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충무공에 대한 인식은 부정 일색이었다.
1977년 출판된 북한의 역사교과서 <조선통사(상)>에서는 충무공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식을 엿볼 수 있다.
"... 그러나 이순신이 그때 나라를 지켜 잘 싸웠지만 그는 양반지주계급이였고 무관이였으므로 어디까지나 봉건왕권에 충성하여 양반지주계급을 위하여 싸웠다. 이순신이 그 때에 지키려고 한 나라는 진정한 인민의 국가가 아니라 봉건통치배들의 이익을 위한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을 비롯한 당시 이름있는 명장들의 애국심은 계급적 및 시대적 제한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즉, 주체사상이 확립되면서 더 이상 김 주석 외에 다른 영웅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북한에서는 충무공의 계급적, 시대적 한계성을 드러내면서 깎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북한 역사학계에서 충무공을 비롯한 임진왜란사 연구는 근 20여 년의 세월 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불기 시작한 '리순신 열풍'
주체사상이 채택된 북한사회에서 더 이상 충무공이 설 자리는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충무공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북한을 이끄는 새 지도자의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도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붕괴되면서 북한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사라진 탓이다. 결국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판단한 북한은 '조선민족제일주의'라는 사상을 표방하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김일성 주석의 뒤를 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선 민족과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조선민족제일주의를 표방하며,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자 한다. 이때부터 북한에는 '광개토태왕릉비', '단군릉', '동명왕릉' 등 민족성을 과시하기 위한 문화재들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충무공 역시 이러한 흐름을 타고 과거의 억울한 누명(?)을 벗어던졌다. 다시 역사 속의 위인으로 재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2005년 6월 17일,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내 KBS 방송사에서 2004년 방영한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즐겨본다는 말까지 했다. 또 북한의 조선중앙TV는 거북선과 충무공에 대한 과학영화, <우리 민족의 자랑 거북선>을 방영하기도 했다.
진정으로 충무공을 기리는 길
▲ 6.15 남북공동선언을 지켜보는 충무공 동상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고 있는 영상을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지켜보고 있다 - 영화 <천군>에서 캡쳐 |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과연 진정으로 충무공을 기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정치인들은 틈만 나면 '백의종군'이니 '금신전선 상유십이(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니 하는 충무공의 발언을 인용하지만, 정작 충무공의 정신을 이해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붕당정치의 폐해로 결국 전쟁까지 불러일으킨 충무공 시대나, 경제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지고 남북관계 역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도 정쟁에만 골몰하는 대한민국이나 결국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28일 충무공 탄신 471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충무공을 생각한다. 그리고 충무공이 진정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했던 정신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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