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시시각각] "탄환이 한 발밖에 없다"

4·13 총선이 희한하다. 여야 대결은 없고 여여 충돌, 야야 갈등만 눈에 보인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친박 공천장에 도장을 찍어줄 수 없다며 짐 싸 들고 고향에 내려갔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는 그를 포위한 친문재인 세력과 일진일퇴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 대표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패권적 존재 때문이다.
정당구도가 1여2야로 재편될 때만 해도 사람들은 새누리당의 완승을 예상했다. 야권분열 효과였다. 새누리당은 이 굴러들어온 떡을 패권 공천으로 걷어차 버렸다. 인물구도에 실패한 것이다. 출렁이는 선거판의 향방은 이제 122석 수도권 민심이 가를 것이다. 수도권 민심은 오만한 권력에 민감하다. 모호하지 않다. 자기의 주권을 명백하게 투표지에 반영해 차기 정치지형을 재조직해 왔다. 현재까지 선거 이슈는 ①김종인이 친노패권 세력을 넘어설 수 있을까 ②유승민이 친박패권을 견뎌낼 수 있을까로 요약된다. 다른 크고 작은 문제들은 대체로 이 이슈에 수렴된다.
정치권 내부의 추악한 모습에 유권자까지 절망할 필요는 없다. 역설적으로 올해 선거는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이었던 운동권적 집단 패권주의를 청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보수정치의 고질병이었던 제왕적 1인 패권주의 문화를 심판하는 자리도 된다. 운동권적이든 제왕적이든 패권주의는 공동체의 의사결정 능력, 문제해결 능력을 치명적으로 갉아먹는다. 의사결정의 실력이 정치의 실력이다.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힘만 있으면 법과 상식을 넘어 자기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관철할 수 있다는 패권적 사고방식이 진짜 문제였다. 패권적 민주주의는 소통과 상식을 중시하는 문제해결형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나라의 미래가 거기에 달렸다.
유승민은 새누리당 탈당을 결행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참모형 이미지의 유승민은 이 선택으로 지도자형 정치인의 첫걸음을 뗐다. 박 대통령은 그를 공천에서 배제시키려 했지 집권당의 울타리 바깥으로 내쫓을 생각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유승민의 사죄와 불출마 선언을 기대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심경은 청와대 관계자의 “탈당해서 무소속 출마하는 건 유 의원의 미래에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코멘트에 잘 녹아 있다.
그제 밤 유승민의 대구 연설은 퇴로를 끊은 전사(戰士)의 인상을 풍겼다. 그의 메시지는 “저 개인의 생사에 대한 미련은 오래 전에 접었다”→“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어떤 권력도 국민을 이길 수 없다”→“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로 나아가겠다”의 세 단계로 짜여졌다. 사생관과 정치관, 미래 비전이 점층적으로 잘 배치됐다. 두 번째 단계의 ‘어떤 권력도 국민을 이길 수 없다’는 대목은 문맥상 박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한 도전적인 문구다.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는 대선 출마자의 캐치프레이즈라고 느껴질 정도로 대담하다. 헌법상 국민권력과 공동체의 따뜻함을 강조하는 유승민식 가치를 공화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글과 말로 정치를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지식 정치인이다.
유승민은 이 연설을 준비하면서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겐 쏠 수 있는 총알이 한 발밖에 없다. 함부로 쏠 수 없고 쏠 때는 명중해야 한다.” 정치적 자원이 빈약하다는 유승민의 자각은 과거 박근혜 의원의 탈당(2002년)이나 김무성 의원의 탈당(2008년)과 비교할 때 정확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박근혜 대통령은 대구 시민의 절대적 지지라는 지역적·대중적 기반이 있다. 당시 김무성 대표는 이명박계의 공천학살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당선 뒤 복당(復黨)의 다리 역할을 할 박근혜라는 당내 기지가 있었다. 유승민은 박근혜 같은 대중적 기반도 김무성 같은 당내 기지도 없다. 수도권 민심이 악화될수록 대구 민심은 ‘박근혜를 지키자’는 수호 심리로 확 돌아설 수 있다. 유승민은 배신자인가 공화주의자인가. 판단은 유권자의 몫이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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