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영웅 시리즈] 맥도날드 알바생에서 시작해 미국 정치 넘버3에 오르다

2016. 2. 2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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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폴 데이비스 라이언 미국 연방 하원의장
[사진 Wikimedia]
2010년 폴 라이언 의원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건강보험개혁법안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사진 Wikimedia]

미국 하원은 지난해 10월 29일 전체 회의 투표에서 과반인 236표(총 435표)를 얻은 9선의 폴 데이비스 라이언 의원(46·위스콘신)을 존 베이너(오하이오) 하원의장의 후임으로 선출했다. 미국에서 하원의장은 대통령과 부통령에 이어 ‘정치 권력’ 넘버3에 해당하는 막강한 자리다. 양원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은 상원이 하원보다 권한이 더 막강하다. 상원은 각 주에서 2명이 선출돼 주 대표 역할을 하지만 하원은 작은 지역구 단위로 뽑혀 지역 대표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원의장은 부통령이 겸임하기 때문에 하원의장이 권력서열 3위에 해당한다.

1970년 1월 26일생인 라이언은 불과 만 45세의 젊은 나이에 그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40대 기수’인 셈이다. 150년 전인 1875년 39세의 나이에 취임했던 31대 제임스 브레인 의장 이후 가장 젊은 청년 하원의장의 탄생이다. 미국 의회 사상 최연소 하원의장은 1839년 30세에 자리에 올랐던 로버트 헌터다. 현재 미국 정치권에선 라이언이 다음 대선인 2020년 공화당의 유력 주자로 떠오를 것이라는 말이 나돈다. 만약 그가 202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1845년 제11대 대통령을 지낸 제임스 K 포크 이후 상원의원을 거치지 않고 하원의장 출신으로 백악관에 입성하는 두 번째 사례가 된다.

라이언은 젊은 나이인데도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에서 강경보수파로 분류된다. 전임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물러난 것도 공화당 강경파의 눈밖에 난 때문으로 분석된다. 3연임에 성공한 베이너는 임기를 마친 뒤 의장직을 에릭 켄터 하원 원내대표에게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강경파의 비난 속에 자진 사퇴의 길을 택했다.

16세 때 아버지 잃고 알바로 학비 벌어

라이언은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주의 소도시 제인스빌에서 4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친가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이며 외가는 독일·영국계다. 5대째 위스콘신 토박이다. 16살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급사하면서 한동안 사회보장연금을 받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알츠하이머를 앓던 할머니를 돌보면서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맥도날드 매장 아르바이트를 하는 힘든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육상·축구·농구 선수로 뛰는 등 활기찬 고교 시절을 보냈다. 이런 라이언이 미국 하원의장에 오르면서 어려운 상황에서 학업을 계속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1988년엔 마이애미대(마이애미는 플로리다주에 있는 도시 이름이지만 이 대학은 오하이오주에 있다)에 들어가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에 다니는 중에도 웨이터나 헬스클럽의 피트니스 트레이너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가 하원의장에 오르자 CNN을 비롯한 상당수 미국 언론은 노동계층 출신으로 사다리를 하나하나 밟아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라디오 진행자 존 실베스터는 20년 전 멕시코 식당에서 당시 위스콘신의 연방 상원의원이던 루스 파인골드와 저녁식사를 하다가 그곳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라이언을 만났다고 말했다. 파인골드는 당시 이미 고인이 된 라이언의 아버지와 잘 알던 사이였다. 이런 사연은 라이언이 정치에 입문할 때 상당한 도움이 됐다. 젊은 노동계급 출신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고생담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기를 즐겼다. 2012년 덴버에서 연설하며 “젊은 시절 맥도날드에서 버거를 뒤집고 있을 때, 커다란 호바트 상표의 설거지 기계 앞에 서있을 때, 또는 테이블 서빙을 할 때 나는 그것이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여정에 있으므로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이든 언젠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유세 연설에서도 이를 수시로 말한다.

라이언은 노동계층 출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는 명문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한동안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가 정치를 하면서 재정적인 안정을 얻은 것은 가족·친척의 자금력과 인맥이 상당히 작용했다고도 덧붙였다.

선거 자원봉사로 시작된 정치 경력

실제로 라이언은 위스콘신주 서부지역 연방검사장을 지낸 할아버지와 성공한 변호사였던 아버지를 뒀다. 숲으로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성장했으며 친가·외가 모두 재정적으로 풍족하다. 집안에는 투자 매니저와 기업체 대표, 건설회사 오너가 수두룩하다. 선거 때면 집안에서 수만 달러를 모금해 전달한다고 한다. 첫 선거 때 집안에서 4만 달러를 모금해 넘겨줬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폴 머리 라이언은 42만8000달러의 부동산을 비롯한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다만, 유산은 그가 30세가 넘어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가장이 세상을 떠나자 라이언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당장 일자리를 구해야 했으며 라이언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라이언 하원의원 사무실의 공보담당자는 “이런 스토리는 라이언 의원이 시작은 낮게 했으나 열심히 일함으로써 위로 오르려고 노력했다는 메시지”라며 “고교 시절 아버지를 여읜 젊은이에게 일이 중요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좋은 배경도 본인의 의지와 능력이 부족하면 휴지조각이 될 수 있고, 어려운 시절도 강인한 의지만 있으면 삶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배경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어떻게 혼자 힘으로 극복했는가에 그 인물의 이미지가 달렸라는 의미다. 수많은 ‘흙수저’ 젊은이들이 실제로는 ‘금수저’인 이 젊은 정치인에 열광하는 이유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것은 전임 하원의장인 존 베이너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골수 공화당 지지자인 그는 대학 재학 중 공화당 하원의원의 선거운동 자원봉사를 했는데 그 의원이 바로 베이너였다. 선거운동 자원봉사자로 나선 것이 하원의장 바통을 이어받는 인연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야말로 정치판 아메리칸 드림이 아닐 수 없다.

1991년 마이애미대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정치에 입문했다. 위스콘신주 출신의 공화당 소속 연방 상원의원인 밥 카스텐(73)의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출발해 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의원 보좌관이 된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우편물 관리 담당’. 미국 기업에서는 대개 신입 사원이 우편물을 담당한다. 권력의 사다리를 맨 밑바닥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경제담당 보좌관을 맡는 등 이 사다리를 하나하나 올라갔다. 의원 보좌관도 박봉이어서 밤에는 웨이터와 헬스트레이너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3년 카스텐이 민주당의 파인골드에게 패배해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함께 일자리를 잃었다. 라이언은 그 뒤 국회의사당 건물에 있는 멕시코 음식점인 토르티야 코스트에서 웨이터로 일했는데 그때 아버지 친구인 파인골드를 만났다. 그는 일자리를 그만두고 잭 켐프와 동료 하원의원 출신이 세운 엠파워 아메리카라는 정치 컨설팅 회사에서 연설문 작성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켐프는 조지 HW 대통령 밑에서 장관으로 일한 인물로 부통령 후보도 지냈다.

여기서 일하다 1998년 고향으로 돌아간 라이언은 위스콘신주 1구에서 28살의 나이에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했다. 이후 8번의 선거에서 매번 55%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할 만큼 높은 인기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9선을 기록하고 있다. 주말에는 반드시 제인스빌의 자택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낼 정도로 가정적이다. 가정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공화당의 이념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 저격수’로 떠오른 정치 샛별

라이언이 정치적으로 명성을 얻으며 ‘큰 인물’로 성장한 것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저격수를 맡으면서다.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의 새해 국정 연설에 각을 세워 맞선 대응 연설로 ‘오바마 저격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공화당의 샛별’로 떠오른 그가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된 것은 2012년 대선 당시 밋 롬니 공화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면서다.

라이언은 강경보수파이지만 협상과 타협의 정치를 존중하는 의회주의 인물이기도 하다. 2013년 오바마케어, 즉 건강보험개혁법의 폐지를 둘러싸고 오바마의 민주당과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이 예산안 다툼을 벌일 때였다. 격렬한 싸움으로 연방정부 셧다운(부분 업무 정지) 사태까지 갔을 때 그는 민주당과 협상을 맡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화당 초강경파를 설득하고, 민주당과의 협상도 성공시켰다. 이를 통해 정치력을 인정받으면서 당내 입지도 크게 올라갔다. 경제·재정에 밝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적극 지지한다.

젊은 라이언은 피트니스에 푹 빠져 있으며 마라톤 풀코스도 뛴다. 집안 남자들이 60살 이전에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가족력이 있어 건강관리를 위해 청소년기부터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이자 지역구인 제인스빌의 양궁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양궁에도 빠져있다. 활로 사냥을 하기도 한다. 부인 제너와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라이언이 걸어온 길

1970년 위스콘신주 제인스빌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남. 조셉 A 크레이그 입학 후 반장·학생대표로 봉사. 중2 때 맥도날드에서 패티 굽는 아르바이트. 16세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

1988년 마이애미대 입학. 정치학·경제학 전공. 웨이터·헬스트레이너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생활비 마련. 공화당 하원의원인 베이너 전임의장 선거운동 자원봉사.

1991년 마이애미대 졸업 후 공화당 상원의원 밥 카스텐의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시작해 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함.

1993년 카스텐 상원의원 선거 패배로 일자리를 잃음. 국회의사당 건물에 있는 멕시코 음식점에서 일하다 정치 컨설팅 회사 ‘엠파워 아메리카’의 연설문 작가가 됨.

1998년 위스콘신주 1구에서 28살의 나이에 하원의원 당선. 지금까지 9선 기록.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의 새해 국정 연설에 맞선 연설로 ‘오바마 저격수’가 됨.

2012년 대선 때 밋 롬니 공화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

2013년 건강보험개혁법 폐지를 둘러싸고 민주당과 예산안 다툼을 벌일 때 극적 합의 이끔.

2015년 미국 연방 하원의장 취임

정지원 자유기고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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