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선덕여왕을 볼 수 있는 단 '하루'
[오마이뉴스 글:정만진, 편집:최은경]
▲ 1232년 몽고군의 2차 침입 때 부인사는 전소된다. 이때 초조대장경도 함께 불탔다. 사진은 대구시 기념물 3호로 지정된 '부인사 터'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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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무려 70년이라는 세월을 바쳐 부인사 대장경 판각을 만들었다. 아니, 그냥 '대장경' 판각을 만들었다. 거란의 침략을 호국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려는 종교적 발상의 결과였다. 부인사 대장경 판각은 1011년부터 판을 짜기 시작하여 107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하지만 몽고군은 이를 무참히 불살랐고, 그래서 해인사 '재조(再雕)대장경' 판각이 재차 만들어지면서 부인사 판각은 '초조(初雕, 처음 새긴)대장경'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몽고군의 방화로 사라진 부인사 대장경
'터'와 '址' |
일반적으로 '절터'에 가면 안내판에 '寺址'라 쓰여 있다. '황룡사터'를 '황룡사지(黃龍寺址)'로 표현하는 식이다. 물론 '황룡사지'를 '황룡절터'로 나타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황룡사지' 아닌 '황룡사터'로 적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필자는 글을 쓸 때 '址' 아닌 '터'를 사용한다. 대구시 기념물 3호의 문화재청 공식 명칭은 '부인사지'이지만 이 글에서도 '부인사터'로 적는다. 부인사에 있는 문화재 중에는 문화재자료 22호인 '일명암지(逸名菴址) 석등'이 있다. 이름(名)을 잃어버린(逸) 암(菴)자 터(址)에 있던 석등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이름을 잃어버린 암자터에서 발견된 돌로 만들어진 등'이라고까지 풀어서 표기할 수는 없지만 '일명암터 석등' 정도로 나타내는 것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
부인사에는 두 가지의 한자 표기가 있다. '夫人寺'와 '符仁寺'이다. 부(夫)를 사용하여 절 이름을 표기한 경우는 958년에 세워진 옥룡사 동진대사 보운비, 1530년의 <신동국여지승람>, 1920년대 이후의 <대구부읍지(府邑誌)>에서 볼 수 있고, 부(符)로 나타낸 사례는 1241년의 <동국이상국집>, 1382년의 <진각국사비문>, 1453년의 <고려사절요>, 1454년의 <고려사>, 1486년의 <삼봉집>에서 확인된다. 부(夫)를 사찰 이름으로 쓴 것은 부인사가 '7세기 중반 선덕여왕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유력(부인사 안내판의 표현)'하기 때문이다. 부인사(夫人寺)의 '부인'을 선덕여왕으로 보는 것이다.
▲ 대구시 기념물 3호인 '부인사 터' 말고도 부인사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들 (사진 왼쪽부터) 유형문화재 17호 서탑(1964년 복원), 석등(유형문화재 16호, 통일신라 시대 작품, 1964년 복원), 일명암지 석등(문화재자료 22호, 고려 전기 작품 추정), 부도(유형문화재 28호, 조선 전기 작품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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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전인 2009년에도 부인사를 국민들에게 널리 홍보해준 연속극이 있었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팔공산 부인사로 많은 방문객들을 보내주었다. 대구시 동구 팔공산로 967-28에 있는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원당(願堂,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절)답게, 여승들이 수행을 하면서 절을 이끌어가고 있는 비구니(比丘尼)사찰이다.
음력 3월 보름날에만 얼굴을 보여주는 선덕여왕
부인사에 가면 지금도 여왕을 제사 지내는 '선덕묘(善德廟, 현재 이름은 숭모전)'가 남아 있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사찰에서 일반인을 매년 음력 3월 보름마다 꼬박꼬박 제사 지내는 경우는 예삿일이 아니다. 그래서 부인사를 방문한 답사자들은 선덕묘에 걸려 있는 여왕의 초상이 보고 싶다. 하지만 음력 3월 15일이 아니면 여왕은 일반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 선덕여왕의 초상. 이 그림은 숭모전(오른쪽 사진) 안에 걸려 있다. 사진 오른쪽 상단에 팔공산 정상부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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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발발 열하루 만에 팔공산까지 들이닥친 일본군
4월 13일 부산포에 진입한 일본군은 며칠도 지나지 않은 4월 21일 팔조령(대구와 경북 청도군 경계의 고개)을 넘어 대구의 남쪽 마을인 파잠(수성구 파동)에 들이닥쳤다. 적들은 이내 대구읍성과 대구향교 등을 점령했고, 23일에는 무태(대구 서변동) 뒷산 도덕봉을 넘어 팔공산 중턱 파계사까지 몰려 왔다. 파계사는 부인사 바로 아래에 있다.
▲ 부인사 대웅전 지붕 너머로 아스라히 공산성이 보이는 풍경.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 부민들은 팔공산 정상의 공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부인사는 의병본부로 쓰였고, 동화사에는 관군(대구부사)이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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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원의 <낙재일기> 1592년 5월 28일자 내용 중 일부이다. 일기는 세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경산과 청도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장들이 부인사로 글을 보내왔다는 점이다. 이는, 대구 둘레에 있는 경산, 청도 등지의 인사들이 부인사를 대구 일원 선비들의 왜란 대책 논의 장소로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임진왜란 내내 대구 의병들의 총본부였던 부인사
둘째, 서사원이 저녁에 부인사로 간 일 또한 그곳이 대구 선비들의 왜란 대책 논의 장소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당일 일기를 보면 서사원은 낮에 '대가(大駕, 임금의 가마)가 나간 이후의 일변(日邊, 임금의 주변) 소식을 들었다.' 선조가 서울을 떠난 뒤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당시 대구부사의 거처였던 동화사에서 들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부인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만 왕의 현황과 같은 중요 소식을 들은 서사원이 (다른 곳 아닌) 부인사로 간 것은 그곳이 유력 인사들의 회동 장소였기 때문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셋째, 서사원은 '거대한 도호부(巨府)'인 '우리 고을(吾邑)' 대구에 아직도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을 개탄하고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이 감정을 서사원 혼자만의 것으로 해석할 일은 아니다. 비록 그가 가장 먼저 그러한 개탄과 수치를 느꼈다 하더라도 부인사에서 만난 여러 선비들에게 그 마음을 토로했을 것이며, 다른 선비들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졌고, 또 밝혔을 터이기 때문이다. 즉, 부인사는 왜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현안을 놓고 대구 선비들이 고민을 거듭하던 공적 논의 공간이었음에 틀림없다.
▲ 팔공산 전경.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의 관군, 의병, 일반백성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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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그 무렵은 이미 대구 선비들의 개별적 창의가 시작된 이후였다. 최동보가 고을 사람 70여 명을 모아 의병 부대를 편성한 것이 4월 19일이었고, 해안(대구비행장 일원) 금호강변 화담(花潭)에 머물고 있는 왜적을 기습하여 총과 장창 50자루를 빼앗은 때가 4월 26일이었다. 최동보는 5월 4일에도 (경북) 경산 임당에서 접전을 벌여 총 32자루, 장창 27자루, 말 12마리를 탈취했다.
또 정여강이 맏아들 정용과 함께 고을 장정 및 노복 100여 명을 모아 창의한 때도 5월 28일보다 한참 이전인 5월 6일이었고, 왜적이 약탈을 벌이는 하빈 이천(정사철의 선사재 일원)으로 출전하여 왜적과 전투를 벌인 때도 5월 7일이었다.
개별적 창의와 전투는 4월에 이미 시작
▲ 임진왜란 당시 공산성이 있었던 팔공산 비로봉의 모습. 부인사 뒤편 서봉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부인사와 서봉까지는 3.34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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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구 지역 유림의 최고 지도자였던 63세의 정사철이 5월 28일보다 불과 사흘 뒤인 6월 1일에 그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5월 28일 부인사 회동'에서 창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구본욱의 논문 <대구 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은 <태암집>의 기술을 근거로 '팔공산으로 피란을 온 대구 지역의 인사들은 5월 28일에 이르러 팔공산 부인사에서 회합하여 창의를 발의하였다'고 규정한다.
개별 창의는 진작부터 시작되었지만 5월 28일에는 대구 전역을 아우를 수 있는 대규모 창의를 위한 결의가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이날의 의의를 구본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대구 지역의 의병은 다른 지역과 달리 개별적인 의병 활동보다는 대구의 전 지역에 의병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향회(鄕會, 대구 유림 총회의 의미)를 개최하여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 팔공산에 본부를 둔 대구 의병 총군)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원동력은 임진란 이전에 연경서원 등의 강학을 통하여 형성된 인재들의 존재였다.
대구 선비들, 5월 28일 대규모 창의 결의
구본욱의 논문에 정리된 바를 따르면, 대구 지역의 대규모 창의 준비는 5월 28일 이후 계속된다. 6월 2일 서사원, 정광천, 서행원, 이주, 은복흥 등은 동화사에 머물고 있는 대구부사 윤현을 만나 창의 문제를 논의한다. 이들은 그후 곽재겸, 손처눌, 전길, 이상문, 채몽연 등과도 의병을 일으킬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6월 14일에는 서사원, 유요신, 서사술 등이 팔공산 정상 공산성에 많은 피난민들이 올라와 있는 광경을 살펴본다. 그리고 6월 22일, 6월 27일, 6월 28일에도 많은 선비들은 동화사에 모여 의병 창의를 논의한다. 동화사에서 회의를 가졌다는 것은 이때 대구부사도 이 논의에 줄곧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 사이 6월 22일에는 김면의 의병 격문이 부인사에 도착했고, 곽준, 문위, 이승이 연명으로 작성한 통문도 왔다. 26일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수가 보낸 관문(關文, 공문)도 왔다. 이윽고 7월 1일 서사문이 의병 창의를 외치는 격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 초안을 작성했고, 그 이튿날 초안을 팔공산 주변의 유력 가문에 회람시켰다. 초안을 유력 선비들에게 두루 읽힌 것은 '중지를 모아 결속력을 높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우인수 논문 <대구 지역 임란 의병의 성격과 선비 정신>).
▲ 부인사의 서탑(유형문화재 17호). 그러나 이 탑은 대구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부인사에 모여 있던 1592년 당시에는 무너진 채 땅에 뒹굴고 있었을 듯하다. 이 탑이 복원된 것은 1964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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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이 돋보인 대구 의병대장 선임 | |||
부인사의 대구 의병소가 향병대장으로 정사철을 선임하는 등 의병 조직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인 7월 24일 경상도초유사 김성일의 공문이 도착한다. 대구가장(大丘假將, 임금의 결재를 받기 이전에 초 유사가 임시로 임명한 대구 의병대장)에 최계, 소모관(召募官, 의병 모집 책임관)에 서사원과 정사철, 유사(有司, 실무 책임관)에 박충후, 류요신, 채선행, 정여강, 이주를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초유사 김성일의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부분'이라고 해석한다. 김성일이 보내온 공문의 인선은 <정만록>에 실려 있는 그 자신의 장계 중 '신(김성일)이 각 읍에 통문하여 그 자제들 중에서 유식한 자를 가려서 소모관으로 삼고, 무관들 중에서 가장으로 삼으라고 하였삽더니(하략)' 라는 대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구부의 의병진이 자체적으로 완성되어 일이 상당히 진행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유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기가 어려웠다. 이에 (부인사 의병소에서는) 초유사에게는 8월 4일 양해를 구하는 답서를 보내 상황을 설명한 듯하다.' (<낙재일기> 8월 4일자에 '답장을 써서 초유사에게 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성일도 대구 지역에서 자율적인 향회를 통해 인선을 끝낸 의병진에 대해 이런저런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
당일 일기에 '(선비들이)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정상사(鄭上舍, 정사철)를 대신하라'고 하였으므로 '사양하였지만 부득이 (향병대장을) 맡았다'고 기록했던 서사원은 왼팔 마비 현상이 나타나는 등 온몸이 만신창이였지만 승중손(承重孫, 아버지를 여읜 뒤 조부모의 타계를 맞이한 손자)으로서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 8월 29일까지 향병대장으로 활동했다.
조부모, 부모 별세로 연이어 의병대장 사임
서사원의 뒤를 이어서는 손처눌이 1593년 2월 부친상을 당할 때까지 향병대장을 맡았다. 손처눌은 '대구 향병의 창의가 일어날 당시 수성현 한 지역을 맡는 의병장으로 임명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의병 초집 활동과 관련하여 매우 성의있는 태도와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서사원과 의기투합한 바 있던 인물'이었고, '그 이전부터 서사원과는 학문적으로 대구 지역을 대표하던 존재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사원에 이어 의병장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우인수 논문)'
손처눌의 뒤를 이어서는 이주가 1595년 2월 모친상을 당할 때까지 직무를 수행했다. 이주가 자신의 <태암집>에 남긴 '내가 본래 재주가 없는데 홀로 여러 일을 거느리자니 "사람은 가벼운데 책임은 무겁다"는 탄식을 감당할 수 없다'라는 소감은 '임진란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과 이주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구본욱 논문)'
결과적으로 대구는 의병 창의가 매우 늦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경산 시지>의 '경산, 하양, 자인 지역은 여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빨리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대구, 경주 등지가 적에 의해 장악되어 의병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것과 달리 이 지역은 적이 약탈을 자행하기는 했으나 주둔하지 않아 의병 모집이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이라는 기술이 참고할 만하다. 또 최효식의 논문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 항쟁>에도 '왜적의 주력 부대가 이곳을 통과하였고, 후방 보급로로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으로 분석되어 있다.
▲ 손처눌을 모시는 청호서원(사진 왼쪽, 대구 수성구 청호로 250-11, 황금동)과 이주를 모시는 서계서원(대구 북구 호국로51길 45-17, 서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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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병은 큰 의의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인수는 '구심점이 되는 수령(대구부사)이 군사를 거느리고 관내에 건재해 있는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감안한 상태에서 (대구 지역의 의병 창의가 늦은 사정을)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지역들은 수령이 도망가고 없고 관군도 해산한 지경이었지만 대구는 관군이 건재하고 부사가 지역 유력 인사들과 팔공산에 함께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창의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 대구 동구 망우당공원에 1998년 세워진 임란호국영남충의단. 단기(壇記)에는 '숨겨진 영남 호국 충의사를 찾아' 270여 위패를 충의단 감실 안에 모시고 있다는 내용을 새겨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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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욱의 <대구 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도 대구 선비들의 부인사 창의가 가지는 의의를 두고 '공산의진군은 부인사에 의병을 두고 동화사의 관군과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래서 정유년(1597) 이전에는 왜적들이 팔공산 안으로는 침입하지 못하였다.'라고 평가한다. 팔공산 골짜기와 정상 공산성으로 몰려들었던 대구 부민들이 부인사에 본부를 둔 공산의진군의 활약에 힘입어 무사하였다는 것이다.
부인사! 공산의진군의 존재와 의의에 대해 알고난 뒤 다시 보면, 선덕여왕과 대장경에 이어 임진왜란과 관련해서도 꼭 찾아보아야 할 중요 유적지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부인사 대웅전 지붕 위로 아스라히 보이는 팔공산 정상도 지금껏 무심히 관상해 오던 것과 다르게 느껴져, 아련하게 흘러가는 하얀 구름마저 된바람 휘몰아치는 한겨울을 그곳에서 사뭇 떨며 지냈던 조선 백성들의 창백한 얼굴빛으로 느껴진다. 그래서인가, 문득 팔공산 비로봉의 청색 그림자가 내려오더니 부인사 범종각을 등진 채 하염없이 서 있는 내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사와 관군이 머물렀던 팔공산 동화의 대웅전. 부인사에 머물면서 의병 창의를 논의했던 대구 선비들은 종종 동화사에서 회의를 가졌는데, 이는 대구부사가 의병 창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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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사 답사 순서 |
(1) 주차장 위 부도 감상, 부도(유형문화재 28호)의 주인 승려의 호 '隱通堂' 찾기, 안내판 읽기 (2) 주차장과 부인사 사이, 거대한 고목들 아래의 '부인사 터' 석재들을 돌아보며 몽고군의 침략과 소실된 초조대장경 생각해보기 (3) 석재들 오른쪽의 사찰 정면으로 들어가 (안내판을 읽으며) 서탑 보기(유형문화재 17호) (4) 하얀 화강암으로 된 동탑을 보며 문화재의 시간적 가치에 대해 생각 (5) 쌍탑과 종무소 사이에 있는 (안내판을 보며) 석등 보기(유형문화재 16호) (6) 경내로 들어가 명부전 앞 (안내판을 보며) 일명암터 석등(문화재자료 22호) 보기 (7) 범종각 옆에 서서 팔공산 정상(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피란을 갔던 공산성)을 바라보며 전쟁의 문제점, 의병 창의 정신에 대해 생각하기 (7) 숭모전을 둘러보며 선덕여왕 생각하기 (음력 3월 15일이면 숭모전 내 여왕 초상 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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