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오면 소녀는 땅속에 숨어야 했다
해방 이후 당시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살던 열대여섯 살 소녀 강옥준은 수시로 땅속에 들어가 빼빼 마른 몸을 웅크리고 숨죽였다. 부모가 딸을 지키려고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야산에 파놓은 굴이었다. 마을에서 5리(약 2㎞)쯤 떨어진 서삼릉에 미군이 주둔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여자들을 잡아갔다. 숨바꼭질 술래라도 되는 양 집집마다 뒤져 여자를 찾았다. 쪼그만 것도 여자라면 끌고 가서는 강간하고, 방생하듯 돌려보냈다.
미군 오는 날
미군이 온다는 말이 들리면 부모는 황급히 딸을 굴로 데려가 숨기고 입구를 풀로 덮었다. 저녁에 한 번 어머니가 와서는 그 풀을 들추고 밥과 김치를 넣어줬다. 미군은 대개 낮에 왔지만 밤에도 와서 뒤질 때가 있어서 굴에 한 번 숨으면 늦게까지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10촌 여동생도 다른 곳에 숨었지만 들통 나 끌려갔다. 강옥준보다 나이가 어렸는데도 미국인들은 기어이 잡아가서 그 몹쓸 짓을 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살아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자기가 잘못해서,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걸로 여겼다. 항의는커녕 말리지도 못했고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총을 멘 미군들이 전쟁포로 끌고 가듯 여자를 앞세우고 데려가면 다들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했다.
굴속은 다리만 겨우 뻗을 정도였다. 강옥준의 키가 1m40이나 됐을까. 찍소리라도 나면 들킬까 봐 혼잣말도 하지 못했다. 요강 하나만 끼고 앉아 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어둠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기다릴 뿐이었다. 하염없는 갑갑함보다 ‘잡혀가면 죽는다’는 공포가 더 컸다. 저 어린 나이에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시대는 정상이 아닐 것이다. 그 시절엔 누구나 죽음의 무게를 느꼈다.
땅속으로 숨지 않아도 된 게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한창 그 짓을 하다가 어느 날 그냥 끝났다”고 83세 강옥준 할머니는 말했다. 17일 서울 마포구 양원초등학교에서 만난 그는 60~70년 된 일들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했다.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아서 대화가 한 시간을 넘긴지 몰랐다.
그 나쁜 한국놈
할머니가 더 어렸던 일제 강점기에 여자들은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제 와서 일본군 위안부를 자발적 참여자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는데 목격자로서 당시를 기억하는 할머니는 “속아서 가지 누가 그런 줄 알고도 자발적으로 가느냐”고 코웃음을 쳤다. 강제로든 거짓말로든 사람을 그렇게 해외로 데려가는 건 당시 일본 형법으로도 범죄 행위였다.
물정모르는 여자들을 그렇게 군수품 나르듯 실어간 게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인이었다. 가난한 시대가 아니었다면 천금을 준대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강옥준이 살던 그 시절엔 툭하면 쌀이 떨어져서 들판에 이제 막 돋아난 쑥들을 뜯어다 멀겋게 죽을 쒀 마셨다. 그마저도 충분히 먹지 못해 허기를 달고 살았다.
아버지는 커다란 장독 3개에 쌀을 채워 마당에 묻고 끼니때마다 꺼내 먹게 했다. 당시 마을에선 밥할 때마다 쌀을 한 숟갈씩 모아놨다가 세금처럼 내야 했는데 어머니가 그걸 잊은 적이 있다. 일본인을 대신해 쌀을 징수하러 온 남자는 어머니가 땅속에서 쌀을 퍼내는 것을 보고는 당국에 일러바쳤다. 결국 다 뺏겨서 식구가 굶어죽을 뻔했다. 퇴비로나 쓰는 콩 찌꺼기 따위라도 먹지 않았다면 연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땐 그런 한국인이 많았다. 일본에 잘 보여서 뭐 하나 해보려던 사람들.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만 나쁜 놈이 아니었다.
계집애가 무슨
할머니는 11남매 중 여덟 째였는데 살아 있는 형제는 시집·장가를 가고 나머지는 다 병으로 죽어서 외동딸이나 다름없이 자랐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어서 얼굴도 못 본 형제가 태반이었다. 그땐 조금이라도 중한 병에 걸리면 누구나 앓다 죽었다. 집이 가난하기도 했지만 마을에 병원도 없었다. 기껏해야 침놓는 데가 있을 뿐인데 죽어가는 사람을 그 침으로 살릴 수는 없었다.
해방 전엔 일본인이 하는 간이학교를 다녔다.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동그란 딱지 10장을 나눠주고는 한국말을 하면 하나씩 뺏어갔다. 10장을 모두 뺏기면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일본이 한국말의 씨를 말려서 그 세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던 때였다.
그 학교를 한 1년쯤 다녔을 때 해방이 돼 버렸다. 이후 국민학교를 갔는데 아버지가 “기집애(계집애)가 공부는 해 뭐 하느냐”며 책을 전부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그러다가 여자도 한글은 배워야 한대서 야학을 다녔다. 그때 배운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면 누렇게 익은 벼를 어찌 대하리’ ‘돼지 놓고 똬리 놓고 이응자도 모른다면 말갛게 고인 물을 어이 대하리’ 이런 식으로 배워서 한글을 깨쳤다.
방공호에 묻은 조카
열일곱 살에 전쟁이 나서 피란을 떠났다. 강옥준은 서울 아현동 오빠 집에 있다가 부모가 있는 원당으로 나섰고 부모는 그 반대로 오면서 서로 엇갈렸다. 부모 잃은 피란민이 된 강옥준은 먼 친척들 틈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오빠의 딸은 한겨울 피란길에 홍역에 걸려 죽었다. 그 어린 것을 천에다 둘둘 말아 어느 방공호에 놓고 왔다. 눈이 와서 쌓이고 땅은 얼어붙어서 어디다 묻을 수도 없었다. 살려면 죽음으로부터 서둘러 도망쳐야 했다.
내려갈수록 포격이 심해져서 수원까지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 멀리도 가지 못했던 것이다. 부모는 아현동 오빠 집에 와 있었다. 이들 가족은 수색동 벌판에서 채소를 뜯어다 죽을 쒀 먹었다. 거기 살던 사람들이 심어놓고 피란을 가버려서 먹는 사람이 임자였다.
진남포에서 온 남자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세 남자가 남쪽으로 넘어왔다.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잡혀 죽는다고 해서 나라가 갈리기 전에 내려왔다. 셋 중 둘은 형제였다. 이들은 서울 남대문에서 제2국민병(국민방위병)을 뽑는다는 글을 보고 찾아갔는데 형제가 아닌 남자만 합격했다. 그는 거기서 제주로 가서 군사 훈련을 받고 소위 계급으로 전방에 배치됐다.
장교에게는 연락병이 하나씩 붙었다. 진남포 출신 소위의 연락병은 계모 등쌀을 못 이기고 도망쳐 나온 10대였다. 소위는 그에게 “너희 엄마는 너 나온 거 좋아하겠지만 아빠는 너 하난데 잃어버려서 얼마나 걱정이 되겠느냐. 그러니까 편지라도 하라”고 했다. 집으로 써 보낸 편지를 받고 연락병의 아버지가 달려왔다. 그는 소위에게 제대하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이북 출신인 소위는 이남에서 갈 데가 없는 처지였다.
소위는 제대 후 연락병 집에 들어가 큰아들이 됐다. 그 아버지가 된 사람, 그러니까 연락병 아버지가 강옥준 둘째오빠와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의 중매로, 갓 스물을 넘긴 강옥준은 진남포 남자와 결혼했다.
처자식 버릴까 봐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 얘기를 하자면 끝도 없다. 술 좋아하는 남편은 술집여자를 사귀다 아예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바가지를 긁었다가는 그 여자랑 도망 가버릴 것 같아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애들하고 나만 버리지 마라, 그런 마음이었다. 그랬더니 아주 여자를 집에 들여 버렸다.
남편이 들인 여자에게는 오래전 고향에서 좋아하던 남자가 따로 있었다. 여자가 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부모는 “이년아 무슨 고생을 못해 그 가난한 집에 맏며느리로 가느냐”며 결사반대했다. 그러고는 30리 밖으로 시집을 보내버렸다. 거기 가서 금방 남매를 낳기는 했는데 언제나 마음은 옛 남자에게 가 있었다. 결국 집을 나와 서울로 왔고, 술집을 전전하다 강옥준의 남편을 만났다.
그 여자와 한 2년을 살았다. 언니동생처럼 지냈더니 “세상에 저렇게 착한 마누라가 어디 있느냐”고 사람들이 칭찬을 늘어놨다. 여자는 사람들이 자기 칭찬은 안 한다며 “이렇게 욕만 먹고 살 바에는 안 살겠다”고 했다. 하루는 고춧가루, 깨소금 등이 따로 따로 든 병을 다 때려 부수고는 자기가 가져온 이불 하나만 갖고 집을 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가버리면 남편이 의심할 게 빤했다. 강옥준은 그 여자를 도로 주저앉혀 한참을 더 함께 살았다. 나중엔 기어이 도망을 쳤는데 남편은 또 다른 여자를 데려왔다.
70년 만의 등교
남편은 나이가 들면서 달라졌지만 그에게 도무지 깊은 정이 안 들었다. 한쪽에 깊은 사랑을 준 적이 남자였다. 할머니는 진작부터 4남매에게 정을 붙이고 살았다. 남편 때문에 하도 속을 끓여선지 언젠가 심장판막증이 생겨서 지금은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 여섯 살 많았던 남편은 대장암 수술을 잘해놓고도 술을 끊지 못해 76세에 세상을 떠났다. 원당에 4층짜리 단독주택을 아내 명의로 남겨놓고서.
강옥준 할머니는 5년 전 여든이 다 된 나이에 다시 학교를 찾았다. 노인들 모아놓고 약 파는 곳에서 서울 마포구 양원초등학교를 알게 됐다. 거기서 만난 노인이 이런 곳이 있다며 소개했다. 그 말에 혼자 한번 가본 날이 마침 입학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등록하고 정식으로 학생이 됐다. 야학 이후 거의 70년 만이었다.
야학으로 배운 한글 덕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밤낮 우등생을 했다. 하나씩 알아가는 게 그리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4학년 때는 아파서 3개월간 학교를 쉬었는데 사는 재미가 없을 정도였다. 구구단을 외고 간단한 영어를 읽을 수 있게 됐다. 한자 7급 자격증을 땄다. 이제는 5년 과정을 모두 마치고 오는 23일 졸업을 한다.
이제는 여자를 잡아가는 미국인이나 일본인도, 일상을 산산조각 내는 전쟁도, 책을 아궁이에 넣는 아버지도, 바람기로 속 썩이는 남편도, 그 오랜 가난도 없다. “어리고 젊을 적엔 힘들고 무서운 세상에서 고생만 진탕 했는데 이 시간은 아주 행복해요. 지금처럼 좋은 때가 없어요.” 이런 시절은 왜 더 일찍 찾아오지 않았던 것일까.
글=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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