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로 계급 매긴다는 아이들, 경악했다
[오마이뉴스 글:이정혁, 편집:김지현]
아버지는 큰아들의 취학 통지서를 받은 날, 기분이 좋아 친구들에게 술을 샀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취학통지서의 주인공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됐다. 어김없이 그에게도 큰아들의 취학통지서가 날아들었고, 30여 년 전 그날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을 모아놓고 흔쾌히 지갑을 열었다.
학부형이 된다는 것. 그것은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돼 가는 통과의례 중 하나이자, 육아의 단계에서 좀 더 넓은 범위의 교육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무게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외에도, 대한민국의 학부형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요구된다. 이제 막 출발선 상에 선 초보 선수를 목표 지점까지 1등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감독 겸 코치이자 조력자가 돼야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물론, 아이를 '선수'로 길러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내가 사는 지역은 자율적으로 네 곳 중 한 군데의 초등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곳이다. 아파트에서 뛰면 2분, 걸으면 5분밖에 안 걸리는 초등학교를 두고 굳이 차로 15분 이상 걸리는 외진 시골 초등학교를 선택했다. 아파트 옆의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일부러 위장전입 한다는 아이들도 있는 판국에 정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줄넘기 과외'가 필수라는 초등학교 분위기
▲ 산동초등학교 전경 거주지 주변의 여러 초등학교들 중에서 분위기가 가장 훈훈하고, 추억돋는 곳이다. |
ⓒ 이정혁 |
D초등학교에 대한 기찬 소문은 근처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부터 무성했다. 학군에 묶여 있는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는 섞여 놀지 않는다는 둥, 1학년부터 학원이나 과외 두세 곳은 필수라는 둥 마치 강남의 8학군을 연상케 하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꼬리 물린 소문은 이사 후 D초등학교에 다니는 학부형들과 알게 되면서 하나씩 그 실체가 파악됐다.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 섞여 놀지 않을뿐더러, 한 아파트 내에서도 평수에 따라 레벨이 나뉜다고 했다. 내가 사는 106동은 30평형대이고, 101동부터 104동은 40평 이상의 큰 평수의 아파트들이다. 이렇게 자기가 사는 아파트의 동수로 하나의 계급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금수저' '흙수저'의 신분 사회가 바로 초등학교 때부터 태동한다는 경악할 만한 이야기였다.
D초등학교 진학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낸 결정적 증언은 바로 '줄넘기 과외'였다. 체육 등급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아이들에게 줄넘기 과외까지 시킨다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근처의 체육관(태권도·합기도 등)에서 신입생을 모집할 때 내거는 조건들에도 줄넘기 과외나 체육 과외가 반드시 포함된다고 했다. 영수 과외는 기본이고, 예체능까지 과외를 시켜야 아이가 학교에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이어지는 '협박 아닌 조언'... 다른 학교에 눈을 돌렸다
자신보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오후 내내 학원을 돌다가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아이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학원을 안 보낸다 해도, 아이에게는 같이 놀 친구들이 없다고 한다. 다들 학원과 그룹 과외로 빠져나가고, 오후의 텅 빈 놀이터에서 아이 혼자 노는 모습을 발견할 것이라는 협박 아닌 조언이 나오기까지 했다.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 초등학교를 선택한 두 번째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커다란 연못에는 소금쟁이와 부레옥잠이 사이좋게 공존했고, 학교 뒤편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는 하늘소와 딱정벌레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해질녘까지 운동장을 뛰어놀다 마시는 수돗물은 달면서도 시원했다.
철봉에서 허수아비 놀이를 하다가 떨어져 팔이 부러졌던 기억, 친구들과 장난친 대가로 어김없이 재래식 화장실을 청소하면서도 마냥 즐거웠던 일, 나무 그늘에 앉아 버려진 우산살을 갈아 단검을 만들던 일등 초등학교와 관련된 추억은 무궁무진하다. 유년 시절의 황금 같은 기억들은 감수성과 창의력의 밑바탕을 이뤘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인조 잔디 운동장과 우레탄 트랙 위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들이다.
다행히도 근처에 내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분위기의 초등학교가 있었다. 정문을 지나면 오랜 거목이 학교의 주인인양 자리를 잡고 있고, 운동장에는 까치집을 소담하게 얹은 키 높은 나무들이 아이들을 보호하듯 둘러 처져 있는 곳. 사전 답사 차원에서 아이 손을 잡고 갔던 시골의 초등학교는 파란 하늘 아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삐딱한' 학부형의 길
▲ 산동초등학교 정문의 커다란 나무 유년 시절, 나무 그늘에서 더위도 피하고,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새록하다. |
ⓒ 이정혁 |
▲ 산동초등학교 예비소집일 1학년 교실을 가득 메운 예비초등학생들과 학부모들 |
ⓒ 이정혁 |
교실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군데군데 못이 튀어나와 있던 나무 책걸상은 깨끗한 유리로 덮인 말끔한 책상으로 바뀌어 있었고, 왕겨탄과 조개탄을 배급받아 때던 양철 난로 대신 냉난방기가 설치돼 있었다. 쉬는 시간 마다 주번이 지우개로 열심히 닦아대던 흑판은 대형 텔레비전과 화이트보드가 대신했고, 장학사라도 출동하는 날이면 수업 빼고 왁스로 열심히 닦던 교실 마룻바닥은 고급스런 나뭇결 장판이 깔려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인사가 끝나고 간단한 학교 소개 및 주의사항 설명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을 예비 초등학생 녀석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앞으로 펼쳐질 학교생활에 대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30여 분에 걸친 예비소집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지만, 푸릇한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과 그 천진한 표정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온기는 따뜻했다.
이제 나는 학부형으로써 첫걸음을 떼었다. 학생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모두 내 맘 같지는 않으리라. 그럼에도 굳이 아이를 시골학교로 보내는 '삐딱한' 학부형의 길을 택한 것은 내 아이가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기발한 상상을 하며,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다. 선택에 대한 결과는 지켜보시길….
▲ 예비소집일이 마냥 즐거운 큰 아들 초등학교 가는 것이 즐겁기만 한지 교정을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큰 아들 녀석. |
ⓒ 이정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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