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마이너스 물가상승률 구경할까

각오는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셋이나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석유전쟁에 중국 정부의 자충수, 여기다 김정은의 ‘수소폭탄’ 불장난까지. 미국 금리 인상이 기업·가계 부채 뇌관을 건드릴까 노심초사했다가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격이다. 한데 복병이 하나 더 숨어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다. 어쩌면 올해는 사상 처음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구경하게 될지 모른다. 디플레이션의 악몽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통계청이 매달 발표하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한다. 이 때문에 당장 이달부터 담뱃값 인상 효과가 사라진다. 담뱃값은 지난해 1월 1일부터 올랐다. 담뱃값 인상은 지난해 1년 동안 매월 물가상승률을 0.58%포인트 높이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지난 한 해 물가상승률이 0.7%였으니 담배 한 품목의 기여율이 82.5%나 됐던 셈이다. 담뱃값을 올리지 않았더라면 지난해 2~5월 물가상승률은 마이너스가 됐을 뻔했다. 그런 효자가 올해는 없다. 다만 전년동월비로 계산하면 ‘기저효과’도 생긴다. 지난해 물가가 워낙 가파르게 떨어졌기 때문에 지난해와 비교한 올해 물가상승률은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 일종의 착시 효과다.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갑자기 1.3%로 껑충 뛴 게 대표적이다. 2012년 11월부터 25개월 연속 1%대였던 물가상승률이 2014년 12월 0.8%로 뚝 떨어졌다. 그 덕에 2015년 12월 물가상승률은 그 이전보다 불쑥 솟아올랐다. 기저효과다. 이는 이달부터 위력을 발휘한다. 지난해 1~10월 물가상승률이 0%대로 기었던 만큼 올해는 약간만 물가가 올라도 상승률은 높아질 수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저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도 내심 기저 효과를 염두에 뒀을 거다. 한데 예상치 못한 함정을 만났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석유전쟁이다. 핵개발 포기를 대가로 미국과 화해한 이란이 석유 수출을 시작하려 하자 사우디아라비아가 발끈했다. 석유시장의 패권을 빼앗길까 우려해서다. 더욱이 수니파가 다수인 아랍계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가 다수인 페르시아계 이란은 종교·인종적으로 오랜 앙숙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양국이 석유 생산 경쟁을 벌이는 한 국제유가는 바닥을 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석유 소비 블랙홀이었던 중국 경기도 식고 있다.
유가 하락은 국내 석유류와 전기·가스·교통 요금 인하로 이어진다. 이미 휘발유 값은 L당 1200원대가 초읽기다. 지난해 물가가 저공비행을 한 것도 유가 하락 덕분이었다. 연료를 비롯해 주택·수도·전기의 물가상승률 가중치는 1000분의 173이다. 식료품과 비주류음료를 다 합쳐봐야 1000분의 139다. 게다가 기름값이 싸지면 기름 때서 키우는 비닐하우스 채소·과일과 양식 어패류도 풍작을 이룬다.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없다면 저유가의 파급 효과는 식료품에까지 미친다. 정부가 불을 붙여 놓은 각종 세일 바람도 물가엔 찬물을 끼얹을 악재다. 워낙 세일이 많다 보니 제값 주고 물건 사는 사람은 바보가 됐다. 유통업체에 가해질 가격 인하 압박은 갈수록 더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다만 원화가치는 물가를 떠받쳐야 하는 한은에 원군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올해 원화가치는 내리막을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금리 인상에 나선 이상 달러 강세는 피할 수 없는 대세다.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수출품 가격은 떨어지고 수입품 가격은 오른다. 수입품 가격이 오르는 만큼 국내 물가를 밀어 올리는 효과가 있다. 디플레이션을 수출하고 인플레이션을 수입하는 셈이다. 그러나 원화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지면 미국의 금리 인상과 맞물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투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 한은으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디플레이션이 위험한 건 빠져들면서도 빠지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물가가 떨어진다는데 마다할 서민은 없다. 당장 서민의 호주머니 사정은 개선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세난으로 인한 주거비 부담으로 허리가 휘고 있는 서민으로선 한은이 물가를 떠받치겠다고 나선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경제가 활력을 잃어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20년’ 전철을 우리도 밟을 거란 설명은 호랑이 하품하는 소리다. 일본도 1990년대 초반 물가가 0%대로 떨어지자 ‘착한 디플레이션’이라고 반색했다. 어쩌면 한은 앞에 놓인 숙제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난제는 저물가와의 사투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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