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간 20만명 학살한 이승만, 친일파 처형은 0명"
[오마이뉴스 김성수 기자]
☞ 인터뷰 1편에서 이어집니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들에 대해 일부 미군들이 저지른 행위는 '전쟁범죄'로 볼 수 있는가?
"'전쟁범죄'는 가해자 의도를 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폭격의 경우 가해자 의도를 피하기 위해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가 개발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아무나 죽어라' 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는 '폭격'이나 '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피난민간인을 살해하는 '토벌작전'을 합리화한다. 그러다 보니 이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 번의 우발적인 사건이어도 문제가 있지만 학살이 반복되었다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수적 피해'와 '전쟁범죄'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민간인을 적으로 여기고 공격한 행위는 충분히 입증된다. 1950년 7월 26일 미 지상군이 자신들이 소개시킨 피난민임을 알면서도 공격했던 영동 노근리 사건은 이미 전 클린턴 대통령이 사과 비슷한 '유감' 표명을 했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사건이 1950년 7월 10일 연기군 서면 월하리에서 있었으며, 8월 12일에는 창원(마산)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에서 피난하던 주민 86명이 미군에게 살해당했다. 기록을 보면 미군들은 희생자들이 모두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민군 점령 지역의 민간인이나 민간시설을 공격한 행위도 많았는데, 이를 전선의 이동과 비교해 보면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미군폭격사건이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을 미군 항공기가 감시하는 모습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 한국전쟁 중 남쪽 민간인들이 입은 피해는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가'가 아니라 민간인학살이 이승만정권의 '주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나?
"전쟁기의 민간인피해를 대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표현한다. 전쟁은 군인들 사이의 목숨을 건 경쟁이라고 보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생명과 무관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쟁의 참상을 숨기기 위한 완곡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군전쟁 등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옛 전쟁에도 점령지역의 민간인을 몰살시키는 사례가 예외 없이 벌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나는 국방부의 <한국전쟁사1권> 39쪽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를 각각 사망, 부상, 실종으로 구분한 통계를 보고 놀랐다. 군인 경우 사망 22만 8천 명, 부상 71만 7천 명, 실종 4만 4천 명이고, 민간인의 경우 사망 37만 4천명, 부상 23만 명, 실종 38만 8천명이었다.
실종자를 모두 사망으로 볼 수 없겠지만 민간인학살 희생자 대부분이 실종처리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고 일단 사망자와 실종자 수를 합해 부상자 수와 비교해 보았다. 군인의 경우 사망실종자에 비해 부상자 수가 2.6배를 넘는 반면 민간인의 경우는 0.3배에 그친다.
전투를 치러야 하는 국군은 최소한의 자기 방어 장비를 갖추고 있고 작전상의 지휘자가 있으므로 부상자가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민간인들의 사망과 부상이다. 단순히 본다면 부상자 비율이 매우 낮은 이유가 보호 장비가 없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국군의 경우와 북한지역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
전투와 관련 없는 민간인희생자 수가 국군보다 훨씬 크다. 27만 2천 명 대 76만 2천 명. 희생자 상당수는 부상이 없이 사망에 이르렀다. 폭격이 심했던 북한 경우 민간인 부상자는 사망실종자보다 1.6배에 이른다. 남한의 0.3배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민간인이 군인보다 2.8배 더 희생되었으면서도 부상자 수는 오히려 0.32배였다. 그래서 남한의 민간인희생자 상당수가 전투에 따르는 '부수적 피해'가 아닌 '고의적 학살'에 의한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이승만. |
ⓒ 국가기록원 |
"먼저 상식처럼 알려져 있는 통계를 볼 수 있다. 제주나 여순, 이후 토벌작전으로 보아 전쟁 전 1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4권>, 760쪽에는 남한비상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106만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같은 책 1권 39쪽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106만 명의 피살자 발표에 대해 이후 어떤 설명이나 반박의 경우를 못 봤던 것 같다.
한편, 4?19혁명 직후 전국유족회가 주장했다는 114만 명이 있다. 아직 이 근거를 확인한 바는 없지만 당시 이 통계를 유족회가 수집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전국유족회를 구성한 유족회는 대부분 영남지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인데, 아마 이 통계는 정부 측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나는 부역자가 55만 명, 국민보도연맹원이 30만 명이라는 정부 측 자료나 인사들의 발언에 주목한다. 여기에 더해 5만 명 정도의 재소자가 형무소에 있었다는 사실, 11사단과 8사단으로 이어지는 영호남 토벌작전, 미군폭격의 희생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쟁 전 10만 명의 희생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는 부역을 의심받은 주민들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모두 학살당했다는 말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원 생존자가 부역혐의 희생자와 중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중 생존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것만으로도 100만 명 희생자 주장이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정부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1953년이면 희생자명부와 가족명부가 작성되어 전국 경찰서에 배포되었음이 확인되는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 한국전쟁기 이승만정권이 선포한 '비상조치령'이 무엇이고 그것을 왜 '위헌'이라고 판단하는지?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은 1950년 6월 25일 공포된 제1호 대통령령이었다. 주요 내용은 1심만으로 증거 설명을 생략한 상태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악법이었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가장 심각한 측면은 1949년 2차 개악하려던 국가보안법의 내용이 바로 이 비상조치령의 것과 같았다는 점이다. 당시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는데 전쟁의 발발이 이 악법의 재사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전쟁은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법령은 50년 6월 28일자 공보에 실렸는데, 이 때문에 전쟁발발로 정신없던 이승만정권이 25일에 공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6월 25일 공포한 법령이 당일 공보에 실려야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 아닐까 싶다.
비상조치령의 처벌대상은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은 민간인들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조금이라도 무장했다고 판단되면 군법회의가 적용되는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 받았다. 국방경비법 역시 1심만으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법이었다. 정부자료에 따르면, 비상조치령에 의해 처벌받은 민간인들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국방경비법에 의한 피해까지 합치면 전체 피해규모는 대략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비상조치령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내 주장이 아니고,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가 판단한 것이다. 이 결정문은 헌법재판소 도서관 자료집에서 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 헌법은 비록 1심 재판일지라도 대법원의 판단을 받도록 하는 규정이다. 그런데 비상조치령은 이를 어기고 대법원 판단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어 위헌이라는 것이다."
- 스페인 등 외국의 부역자 처리과정과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과정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와 특징이 있는지?
"한국전쟁 부역자처리의 대상은 55만 명이었다. 인민군 점령기 불과 3개월 동안의 부역자들이었다. 2만~3만 명이 1심 재판을 받았고 최소 20만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는 한국전쟁기간 중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3개월 동안 '부역'한 행위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먼저 비슷한 사례가 있을까 고민했다.
먼저 내전을 치른 스페인을 조사했다. 1936년에서 1939년까지 3년 동안의 내전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공화파를 지지했다는 이유였고 당시 프랑코는 이들을 부역자로 간주했다. 이에 비하면 3개월 부역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치에서 해방된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나치에게 점령당한 기간은 1940년부터 1944년이었고 처리대상은 35만 명이었다. 처리결과는 학살이 9천 명, 재판이 1600명. 학살당한 9천 명은 수복 초기에 벌어진 경우로 유대인학살 등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경우와 크게 다르다. 수복하던 국군은 여성동맹위원장 등 '장'자만 붙어도 총살하고 북진했지만 이후 경찰이 복귀하기 전까지 무차별 보복은 크게 없었다. 본격적인 학살은 경찰서 사찰계 주임의 복귀와 함께 체계적으로 시작되는데 대략 50년 10월 6일경에 시작된다.
비교사례로 가장 끔찍한 경우가 우리의 친일파 청산과정이었다. 무려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면서 청산대상은 고작 7천 명에 그쳤다. 이들이 바로 1949년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었는데 이들 중 처형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비한다면 1950년 있었던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는 그 자체가 동족 증오에 기초한 터무니없는 대량학살 전쟁범죄였고 자기부정에 해당하는 국가범죄였다."
- 이승만 정권이 한국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국가범죄가 단순하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는지 아니면 고의성이 있다고 보는지?
"이승만정권에 의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다. 전쟁 전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토벌하는 폭압에도 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생했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이승만정권은 비상조치령을 공포하였고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정치범들을 순차적으로 학살하면서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했다. 한 달 뒤 인민군의 수를 압도한 미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인민군 점령지의 민간인들을 '부역자'라며 그 자리에서 학살했으며, 치안이 확보된 후에는 체계적으로 주민들을 연행하여 고문 후 특정지역에서 집단 총살했다. 같은 시기 영호남지역에서는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국군 11사단이 피난민 등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쟁 발발 직후와 수복 직전 이승만정권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했던 문서와 증언들을 확보했다. 이 안에는 이승만정권의 고의적인 민간인처리 계획이 들어 있었다. 후퇴하는 동안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민간인들을 집단수용하라는 문서를 만들어 각 기관에 발송했으며, 수복하기 직전에는 처리할 부역자 명단을 작성하는 등 대책회의를 열었다. 전선을 오르내리면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학살 사건들은 이들이 세웠던 계획의 실행을 증명하는 것이다. 완전히 의도했다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있을까?"
"대규모 민간인학살 계획 문서들 발견... 역사적 진실 규명해야"
▲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 신기철 |
"유족 입장에서는 명예회복일 것이고 내 입장에서는 역사적 진실규명이다.
당장의 구체적 과제는 여전히 말 못하는 유족들의 입을 터주는 것이다. 희생자들이나 유족들의 고통을 풀어주자는 데에는 여야당 정치인들이 반대하지 않던데, 정책으로 결정할 때는 전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동안 진실을 은폐하면서 덕을 본 사람들이나, 그냥 그렇게 복종하면서 겨우 안정되게 살았던 유족들에게는 불편한 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못하면 병이 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공포정치 이제 그만하고 말이나 좀 하게 해줬으면 한다. 전국의 각 지역사회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나 유족들에게 너그러웠으면 한다. 어디를 가나 어느 분야에서나 이분들을 소외시키는 게 보인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가해자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저런 평범한 자도 악인이 될 것 같다'가 아니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저런 악인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성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심각한 과제는 인권이 존중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정통성 있는 정부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관권 금권 부정선거에 다수의 시민들이 지게 되고 그 결과 부패하거나 독재성향의 지도자가 뽑히게 되면 결국 대부분의 시민들이 위험한 지경으로 몰려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을 적으로 여긴 이승만정권의 행태가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을 존중하는 지도자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 저자 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다녔으며 인천과 구로, 영등포지역 노동운동과 고양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지난 조사자료를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 나타난 유족들을 심층면담하고 있다. 저서로는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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