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 친절' 한국사회의 두 단면] 손님, 커피 나오셨습니다.. 친절 강요에 과잉 높임말 넘쳐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지난 7일 서울 중랑구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주문한 대학생 이모(23·여)씨에게 점원은 이렇게 말했다. 자리에 앉은 이씨는 점원의 말을 곱씹어봤다. 바로 직전 점심식사를 하러 친구와 갔던 식당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식당 종업원은 이씨 일행에게 “지금은 자리가 없으십니다”라며 10여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오셨습니다’와 ‘없으십니다’는 분명 높임말인데, 손님인 이씨를 높이는 말은 아니었다. 이씨가 주문한 ‘커피’와 이씨가 요구한 ‘자리’를 높이는 표현이다. 이씨는 “사물에 높임말을 붙여서 거꾸로 나와 식당 직원은 모두 낮춰진 것 같아 불편했다”고 말했다.
이런 ‘사물 높임말’은 우리 일상에 너무 넓게 퍼져 있다. ‘피팅룸은 이쪽이세요’ ‘포장이세요?’ ‘그 상품은 품절이십니다’ ‘빨대는 뒤편에 있으십니다’ ‘이 제품이 더 좋으십니다’…. 커피점 음식점 백화점 등 접객업소에 가면 흔히 듣게 되는 이 같은 말은 모두 틀린 표현이다. ‘과잉 친절’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잘못된 언어습관을 낳았다.
전문가들은 사물 높임말의 확산 정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고 걱정한다. 송철의 국립국어원장은 8일 “고객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법을 해치는 건 경계해야 한다”며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돈을 위해 사물에 존대하는 현상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사람 대신 돈과 사물이 이렇게 높임의 대상이 되면 사람을 대하는 인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동사나 형용사에 붙은 선어말어미 ‘∼시∼’는 주로 사람을 높일 때 쓰인다. 다만 상대방의 신체나 심리, 소유물 등 주어가 사물이지만 높일 수 있는 간접존대가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눈이 크시네요’나 ‘걱정이 많으시다’는 올바른 표현이다.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 최혜원 과장은 “사물 높임말은 언어 예절에 어긋나며 언어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라며 “문화체육부를 중심으로 언어문화 개선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운동보다는 사회 전반에서 잘못된 언어표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사물 높임말이 범람하자 서비스업체들도 바로잡기에 나서고 있다. 현대홈쇼핑은 2013년 5월부터 자동주문전화에서 꼭 필요한 안내만 제공하고 과도한 존칭과 불필요한 설명을 줄인 ‘스피드 ARS’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올바른 높임말을 쓰면서 기존에 평균 2분40초대였던 서비스 시간을 1분50초까지 줄였다.
커피 프랜차이즈업체 이디야 커피는 지난 8월부터 가맹점에 ‘이디야커피 서비스 간편 매뉴얼’을 배포하고 있다. 특히 ‘사물 존칭’만 따로 떼어내 별도 매뉴얼을 만들었다. 이 매뉴얼은 ‘파우더가 아닌 시럽이 들어가십니다’ ‘잠시만 기다리실게요’ 등 잘못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고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등 주어가 사물이지만 간접높임이 가능한 사례도 포함했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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