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서의 스윙맨]절치부심, 김용희 야구를 생각해본다

이상서 2015. 5. 20. 06: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간스포츠 이상서]

1984년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로 뽑힌 동군의 김용희(롯데)가 부상으로 받은 맵시나 승용차 위에서 모자를 들어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경남고 시절 김용희의 활약 모습.

저도 야구선수였습니다. 지금이야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아시겠지만, 저도 한때 야구선수였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원년 멤버였죠. 부산은 제 고향입니다. 1955년 10월 4일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야구 명문인 경남고를 거쳐 롯데에 들어온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이 고려대와 실업팀 포철에 머문 시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부산에 있었습니다. 저는 구도(球都)에 머물러야 할 운명이었나 봅니다. 포철 시절 허리디스크로 국가대표에서 제외되며 다른 실업 선수들과는 달리 바로 롯데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거든요.

저도 월드스타였습니다. 전준우, 황재균, 그리고 얼마 전 김기태 감독이 외신에 소개되며 해외에서도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죠? 그들보다 30여 년 앞서 해외 언론에 이름이 나온 바 있습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타임지에서였는데요, "야구장으로 갑시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일고 있는 야구 열기"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에 맞춰 특집 기사를 실은 것이죠. 여기서 저는 주목할 만한 투타 대표에 선정됐습니다. 투수는 삼성 라이온즈의 옆구리 투수인 이선희였고 타자는, 네 방금 말씀대로 저 김용희였습니다.

실제로 제법 잘 쳤습니다. 1982년 5월 12일까지 롯데가 치른 17경기 중 4월 11일 허리통증으로 결장한 대구 삼성전을 제외하고는 매 경기 나와 안타를 때렸습니다. 16경기 연속 안타 행진이었죠. 원년 시즌인 만큼 제 안타가 곧 프로야구 신기록이었습니다. 당시 성적은 61타수 20안타 19타점, 타율 0.328이었습니다. 리그에서 타격은 12위, 타점은 MBC 백인천과 공동 1위, 홈런은 삼성 이만수 등과 공동 4위였습니다. 이후 두 경기에서 더 안타를 치며 18경기 연속 안타 수립이란 기록을 달성합니다.

국가대표 부동의 4번 타자이자 3루수였던 김용희는 1980년 도쿄 아마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베스트9에 선발됐다. 당시 일본 아마야구계는 일본 동해대 4년생으로 '제2의 나가시마'로 불리던 3루수 하라(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를 제치고 그가 뽑히자 경악했다.

미스터 올스타. 처음으로 붙여진 제 별명입니다. 1982년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동군 대표로 출전한 저는 3차전에서 7회말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MVP에 뽑힙니다. 이미 광주에서 열린 2차전에서 홈런 두 방을 날리는 등 그 해 올스타전에서 13타수 4안타 7타점이란 성적을 거뒀습니다. 짜릿했습니다. 3만 6900명의 관중이 열광할 때 그 기분이란! 그러고보니 별들의 잔치로 불리는 이것과 인연이 참 깊었답니다. 2년 후에도 여기서 MVP의 영광을 누렸죠. 대전에서 열린 올스타 2차전에서 4타수 4안타(1홈런 포함)의 맹타를 휘두른 덕입니다. 타격-수훈-홈런 3관왕과 베스트10 선정 등은 덤이었습니다. 부상으로 받은 자동차는 외아들인 저를 키워 주신 아버지(김영학 분. 당시 64세)께 선물로 드렸고요. 아, 실업야구 시절인 1978년과 야구대제전(1979년, 1980년)에서 올스타 MVP를 받은 건 쑥스러우니 생략하겠습니다.(하하)

1982년에 저는 많은 보물을 받았습니다. 프로야구 선수가-그것도 고향팀에서-됐고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또한 스프링캠프 기간 중 아들(재호 군)을 얻었고, 구단은 전 선수단에 외출금지령을 내렸음에도 저에게만 특별히 비행기 표를 마련해 아들을 만나게 해줬습니다. 그때 당시 스물일곱 살의 아내(장은실 분)에게 "프로에서 멋진 선물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두 개를 한 것 같네요. 연속안타 신기록과 올스타 MVP를.

벌써 12년 전 이맘 때. 김재호 프로(왼쪽)가 아버지 김용희 감독과 다정히 포즈를 취했다.

압니다. 전 준수한 선수는 맞지만, 압도적인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해 유달리 스타들이 넘쳐났던 탓이기도 하고요. 4할을 기록한 삼성 백인천이나, 22연승을 달성하며 투수 트리플 크라운에 오른 OB 박철순, 38개의 베이스를 훔치며 김일권(해태)을 제치고 도루왕에 등극한 삼미의 조흥운, 원년 홈런왕인 김봉연 등 빛나는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데뷔시즌 제 성적은 타율 0.284에 66안타 11홈런. 통산 성적에 비춰봤을 때 그리 빼어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는 성적이었습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전 프로 마지막 해인 1989년을 제외하고는 기복 없는 선수 생활을 보냈습니다. 아, 영광의 시절이요? 아무래도 1985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해 생애 최다인 101경기에 출장해 프로 경력 유일의 100안타 고지를 정복합니다. 타율도 1986년과 1988년에 달성한 0.293에 이어 높은 0.277을 찍었으니까요. 참, 롯데의 첫 우승을 함께한 1984년도 잊을 수 없겠네요.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으로 회자되는, 바로 그 경기 말입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황금기를 보낸 'KKK'타선. 왼쪽부터 김용희, 김정수, 김용철.

아까 고백했다시피 전 슈퍼스타는 아니었습니다. 프로 8년 동안 3할을 기록한 시즌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타격 타이틀을 가져간 적도 전무합니다(그래도 골든글러브는 3루수로 2번, 지명타자로 1번이나 꼈지만…!). 통산 성적은 534경기 출장, 타율 0.270, 482안타, 61홈런, 15도루. 프로 7년 차 시절이 막 끝난 1988년 11월 26일. 저는 롯데의 플레잉코치로 승격됩니다. 선수 마지막 시즌인 이듬해는 타격코치로 올라옵니다. 그 해 선수로서 출장한 경기가 14번에 불과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죠. 물론 고질적인 허리부상 탓도 컸고요. 이렇게 선수 김용희의 경기가 끝납니다. 그러나 매일 열리는 야구처럼, 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죠.

내 생애 서른 여덟 해 만에 처음으로 이름 뒤에 감독이라는 직함을 붙였습니다. 1993년 11월 20일에 생긴 일입니다. 계약조건은 3년간 계약금, 연봉 각 6000만 원. 이미 1년 전 겨울에 미국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준비했습니다. 개막전 "최소 4위를 확보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겠다"고 당당히 출사표도 던졌습니다. 윤학길-박동희가 이끄는 마운드와 마해영-임수혁-손동일 등이 버틴 타석을 봤을 때 그 시절 롯데는 분명 약팀이 아니었거든요. 감독에 오르면서 결심한 게 있습니다. "무리한 투수진 운용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느낀 대로 팀의 살림 밑천인 투수를 보호겠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특히 당시로서는 생소한, 그래서 '손해 본다'는 빈축에도 선발투수 예고제를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선수를 보호하고 팬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제도입니다. 지금이야 당연하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저는 화를 내는 게 싫습니다. 1995년 10월 7일 LG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우리는 이겼지만, 내용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책이 많았습니다. 무려 5개나요. 여느 감독이라면 흥분도 할 법하지만 저는 평상심을 유지했습니다. 말을 아꼈습니다. 찰나의 침묵 후 한 마디. "푹 쉬어라." 허리 부상으로 부득이하게 일찌감치 유니폼을 벗은 저는 선수들의 고충을 압니다. 무리수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당시 시리즈 2차전에서 전날 등판한 김상현 대신 공이 좋지 않은 박동희를 투입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OB는 강하고 우리처럼 끈질겼습니다. 그렇다고 롯데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시리즈 4차전에서 3타수 2안타에 결승 타점까지 올린 김민재의 깜짝 활약 등을 앞세워 우리는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앞서나갑니다.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날 발생한 김응국의 부상 때문입니다. 6차전에서 끝내고 싶지만─제 야구 신념대로─무리한 경기 운영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5차전에서 김상현을 아낀 이유입니다. 결국, 나머지 경기를 모두 내줍니다. 1차전을 먼저 가져갔음에도 나온 슬픈 결과.

시나브로 계약 마지막 해를 맞이합니다. 1996년 4월, 마지막 출사표라 해도 달라진 건 없습니다. "초반에는 80%의 전력, 여름 이후는 총력전" 응당 목표는 우승이었죠. 그러나 57승 63패 6무로 가을 야구에 초대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광환 감독의 LG마저 탈락하자 언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개 숙인 자율 야구" 공교롭게도 관리야구의 대명사인 김성근 감독의 쌍방울이 플레이오프에 직행하며 극명히 대비됐습니다. 그럼에도 롯데를 저를 신임했습니다. 1999년까지 3년간 3억 7천만 원에 재계약을 한 것이죠.

이듬해는 더 힘들었습니다. 1997년 5월 27일까지 7연패 수렁에 빠지는 등 팀은 1989년 이후 처음으로 꼴찌의 수모를 안습니다. 이유는 있습니다.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100%의 전력으로 경기에 나선 것이 고작 3번뿐이었죠. 주형광과 박지철 등이 삭발까지 하며 결의를 불태웠지만, 몇 년전 개봉한 영화의 제목과는 반대로 '추락하는 팀은 날개가 없었'습니다. 1998년 개막 전 관리형으로 변신을 감행했으나, 박지철과 손민한이 초반부터 이탈했던 게 뼈아팠습니다. 결국 그 해 6월 16일, 저는 감독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감독대행으로 올라선 김명성 투수코치를 조용히 응원할 따름입니다.

1999년 11월 12일 삼성의 수석코치에 올라 이듬해 감독까지 맡습니다. 롯데가 아닌 다른 구단의 지휘봉을 잡기는 처음입니다. 딱 1년을 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다시 감독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리도 많은 시간이 걸릴 줄은.

15년 만이네요. 작년 말 SK 감독에 올랐습니다. 2011년 SK 2군 감독과 육성총괄을 거친 뒤의 일입니다. 3월 29일에는 5283일 만에 1군 감독으로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달라진 건 없습니다. 여전히 무리하지 않는 야구와 시스템 야구는 철학이요, 신념입니다. 지난달 16일 퍼펙트피칭을 펼치던 채병용을 7회에 내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올해 목표 역시 우승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SK가 특정 감독이나 선수에 따라 좌우되는 팀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구단이 되는 것."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일구이무(一球二無·공 하나에 두 번째는 없다)', 김인식 감독의 야구가 '믿음과 소통'이었다면 저의 야구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일 것입니다. 15년을 기다렸습니다. 성적에도 욕심이 왜 안 났겠어요. 그렇다고 무리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야구는 제게 종신지우(終身之憂·죽을 때까지 걱정하는 것)였습니다. 감독을 다시 할 수 있을지 몰랐지만 다양한 시각에서 야구 공부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제 이름은 김용희이고 SK 와이번스의 감독입니다. 감독으로서 두 번째 봄을 맞던 1995년 3월, 제가 했던 말을 상기해 봅니다. "야구는 단순한 육체적인 게임이 아니라 두뇌게임이다."

1995시즌 개막을 앞두고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이 김용희 감독의 지휘 아래 베이스러닝 훈련을 하고 있다.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스윙맨 지난호 보기

▶ '박기량 골반이 누가 작대?' 사직 여신의 아찔 뒤태!

▶ [이상서의 스윙맨] 절치부심, 김용희 야구를 생각해본다

▶ '어깨 수술' 류현진, ML 3년간 어떻게 견뎌왔나

▶ 김인식 감독 "현진아, 조급해 하지 마라"

▶ 강민호를 깨운 장종훈 코치의 '원포인트 레슨'

Copyright © 일간스포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