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34) 존 로크의 '정부론(통치론)' 의무를 다하지 않은 권력에 저항하라
존 로크의 '통치론'은 강정인·문지영 번역본(까치)과 1970년에 출간한 이극찬 번역본(연세대출판부)이 읽을 만하다. 여기에 박치현의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 통치론(아이세움)'을 곁들이면 이해하기 쉽다.

토마스 홉스는 '교회에 대한 국가 우위'를 주장하면서 근대 자유주의 전통을 세우는 데 맨 앞에 선 고전적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사상은 '호비즘(심한 보수주의)'으로 매도됐고, 홉스는 평생 적대자들로부터 신변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의 선구자가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정부론(통치론)'이라는 명저를 남긴 존 로크(1632~1704년)다. 로크는 홉스와 달리 생전 명성을 한껏 누렸고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이끈 볼테르와 같은 열렬한 추종자들을 뒀다. 홉스와 달리 때에 순응하며 시대정신과 정치환경에 맞춰 그의 사상을 개진한 덕분이다.
말하자면 로크는 홉스처럼 유물론이나 무신론을 취하지 않았다. 또 '정부론' 등 저술을 섣불리 발표하지 않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다 결정적인 시점에 출간했다. '주역'에서 말하는 '밀운불우(密雲不雨)'의 기다림을 실천한 셈이다.
흔히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로크가 그랬다. 로크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다. 로크의 할아버지는 포목 장사로 큰돈을 벌었고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아버지의 지인 가운데 알렉산더 포프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하원의원이 된 인물이다. 로크는 포프햄의 추천으로 웨스트민스터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포프햄은 로크의 인생을 바꿔준 '귀인'이었다. 로크는 포프햄에 이어 자신의 일생을 뒤바꾼 귀인을 또 한 명 운명처럼 만나는데, 의회파의 지도자인 섀프츠베리 백작이다. 1666년 여름 어느 날 로크는 런던에서 한 온천의 약수를 마시러 갔다 우연히 백작을 만나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비서로 일한다. 한때 왕당파에 우호적이었던 로크는 백작과의 만남을 계기로 정치적 노선도 의회파로 바뀌게 된다.
섀프츠베리는 당시 왕당파와 대립해 '초록 리본회'를 결성했는데 이게 훗날 '휘그당'이 된다. 섀프츠베리는 또 영국국교회(성공회)에 맞서 비국교도(가톨릭과 청교도)에 대해 종교적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했다. 로크가 '종교적 관용에 관한 에세이'를 쓴 것은 섀프츠베리의 종교적 관용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로크는 이어 백작의 정치적 노선을 뒷받침해주는 여러 글들을 쓰게 되는데, 그게 바로 '정부론'이다.
로크는 50살이 되도록 섀프츠베리 휘하에서 평범한 참모로 살았다. 그런데 섀프츠베리가 찰스 2세에 대한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돼 네덜란드로 피신했다. 로크도 네덜란드로 망명을 갔고 그곳에서 '인간오성론'과 '정부론'을 손질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 섀프츠베리는 죽고 1688년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던 로크는 1689년 2월 귀국길에 오른다. 주역에서 말하는 '이섭대천(利涉大川·천하를 이롭게 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모험에 나선 것)'을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정부에 관한 두 개의 에세이', 즉 '정부론(통치론)'을, 3월에 '인간오성론'을, 5월에는 '종교적 관용에 관한 에세이'를 출간했다.
영국이 절대왕권의 휘하에서 자유를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인민이 제정하는 헌법을 통해 왕을 법 아래 두고자 한 게 핵심이다. 이게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로크의 이 글들은 명예혁명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고 정당화하는 사상이 됐다.
'정부론'은 두 편으로 구성돼 있다. 제1편은 '로버트 필머 경과 그 일파의 잘못된 원리와 논거를 밝히며 논박한다'는 제하로 로버트 필머(휠머)의 왕권신수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제2편은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그 목적에 관한 시론'으로 시민정부의 기원과 정당성과 목적 그리고 통치기관이 정당성을 상실할 경우 시민들이 취할 수 있는 저항권에 관한 내용이다. 흔히 '정부론' 하면 제2편을 가리킨다. 이 글은 당시 의회정과 왕정이 교체되던 과도기에 왕의 절대적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인 이론을 제공했다.
'왕이 권력의 원천이 아니라면 무엇이 권력의 원천일까'에 대한 논리를 제시한 게 바로 제2편이다. 로크는 2장 '자연상태에 대하여'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본 홉스와 달리 자연상태를 긍정적으로 봤다. 또 인간을 이성적이고 평화로운 존재로 파악했다. 홉스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하면서 군주의 절대권력을 옹호한다. 이에 로크는 "절대군주 역시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면서 "군주가 재판관이 돼 기분 내키는 대로 신민들을 다룰 수 있다면 그게 자연상태보다 오히려 못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절대군주제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상태 속의 스컹크나 여우를 피하려다가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로크는 자연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전쟁상태이므로 어쩔 수 없이 정부를 만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동의'해서 정부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어쩔 수 없이 정부를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더 이상 '잘못된 정부'에 대항할 수 없다. 정부란 나쁜 자연상태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고마운 존재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동의를 통해 결성한 사회에는 자연상태에는 없는 법률(입법부)과 재판관(사법부), 집행기관(행정부)이 존재한다. 개인들이 자연상태에서 자기보존을 위해 갖고 있던 처벌권을 동의하에 '양도'했기 때문이다, 로크는 또 '재산'에 대한 논의에서 사유재산권의 논리를 확립해 상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여기서부터 '일하는 자가 소유한다'는 사유재산권 개념이 확립됐다. 로크는 생명, 자유, 자산을 통틀어서 '재산'이라 하고 그 권리를 소유권이라고 한다. 로크가 보기에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가진 권리의 핵심은 바로 소유권이다.
"자연의 이성은 일단 인간이 태어나면 자신의 보존에 대한 권리, 즉 고기와 음료, 기타 자연이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제공하는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가르친다." (5장 25절) 영국에서 명예혁명 이전까지 왕권이 유지된 이유는 무엇인가. 로크는 왕권신수설에 따라 청교도들이 대부분인 상인 계급의 소유권이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왕이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둬도 모두가 왕의 소유이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낼 수밖에 없었다. 상인들은 상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신이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한 논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를 받쳐주는 논리를 로크가 제공한 것이다. 로크가 열렬하게 숭배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정부론'의 핵심은 잘못된 정부에는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으로 집약된다. 정치사회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의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즉 시민의 생명과 재산, 자유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군주나 입법부가 그들의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재판관이 될 것인가? (…) 인민이 재판관이다." (19장 240절) 로크에 따르면 국민은 통치자에게 자신들의 자연권, 즉 자기보존권과 처벌권을 '신탁'한다. 신탁이란 은행에 돈을 맡기고 필요한 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자연권을 통치자에게 잠시 맡겨둔다는 것이다. 이는 권력은 통치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민이 맡긴 것일 뿐이고 언제든지 신탁을 '철회'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로크는 영국뿐 아니라 볼테르의 '관용론', 루소의 '사회계약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에 큰 영향을 줬을 뿐더러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선언의 초석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구자는 때로 시류를 앞서 가 시대와 불화를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로크는 '운칠기삼(運七技三)'과 같은 행운을 누렸고 죽어서도 지금까지 여전히 그 영광을 누리고 있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54호(04.23~04.29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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