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독일 의회에서 퇴출당한 시장자유주의 / 김누리
[한겨레] 지난 독일 총선은 예상대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무난한 승리로 끝났다. 지금 독일 정국은 승패 원인 분석과 향후 연정 구성 협상으로 분주하다. 이런 가운데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중요한 역사적 변화가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채 잊혀간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던 시장자유주의가 독일 의회에서 완전히 퇴출당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에서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유일한 정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국회 입성에 실패하여 1949년 건국 이래 처음으로 원외 정당이 되었다. 자민당의 몰락은 독일 정치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충격적 사건이다. 자민당은 연정 형태이긴 하지만 반세기 가까이 정부를 구성한 최장수 집권당이었고, 1998년 이전까지의 기간만 놓고 보면 49년 중 41년간 집권한 '만년 여당'이었다. 이런 자민당에 독일 국민이 처음으로 레드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제 독일 의회는 기민당-사민당-녹색당-좌파당의 4당 체제로 재편되어,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더이상 없다. 기민당은 재분배를 통해 사후적으로 시장의 부정적 결과를 조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일찌감치 내세웠고, 사민당은 공공 영역의 확장을 통해 시장의 부작용을 선제적으로 최소화하는 '사회민주적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녹색당과 좌파당은 처음부터 시장자유주의에 비판적이다. 기독교의 박애 정신에 기초해 시장의 이기적 탐욕을 순치하려는 기민당이나, 유럽 노동운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시장의 폭력성을 제어하려는 사민당-좌파당이나, 생태계 보존의 견지에서 시장의 무정부주의적 자연파괴를 저지하려는 녹색당은 모두 시장이란 '괴물'을 제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이렇게 보면 자민당의 '퇴출'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시효가 끝나감을 알리는 신호인지 모른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세계경제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장자유주의가 이제 유럽의 중심에서부터 퇴장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시장이 효율적이긴 하지만, 시시때때로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로 변한다는 인식이 폭넓은 편이다. 이미 1982년 독일은 '팔꿈치 사회'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해 '팔꿈치로 옆 사람을 내쳐야지만 생존이 보장되는 치열한 경쟁 사회'의 도래에 대해 경종을 울린 바 있고, 2002년엔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새로운 야수 자본주의. 탐욕과 광기로 나락을 향해 가다'란 제목의 표지로 경제적 자유주의의 위험을 통렬히 경고하기도 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동구권의 몰락을 보며 시장자유주의의 승리를 단언한 바 있다. "경제적 정치적 자유주의의 거침없는 승리는 역사 그 자체의 종언을 의미한다"며, 이제 "인류의 이데올로기적 진화는 종착점에 이르렀고,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그 최종적인 정부 형태로 보편화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자민당의 몰락은 그 '역사의 종언' 테제가 틀렸음을 방증한다.
지난 9월 독일 총선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모든 정당의 집회에 직접 가보았다. 자민당에 대한 반감이 넓고 깊어 놀랐다. 선거 방송에서 자민당의 패배가 발표되자 모든 정당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0월 다시 찾은 독일 의회에서 나는 '문명사적' 사건의 목격자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역사의 승자'가, '이데올로기적 진화의 종결자'가 초라한 몰골로 퇴장하고 있었다. 자민당의 이삿짐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이제 독일 의회에서 시장자유주의는 사라졌다. 그런데 대한민국 의회엔 시장자유주의가 여전히 대세다. 유럽 순방 중에 대통령은 한술 더 떠 공공 부문까지 시장에 개방하고 자유무역을 더 강력히 추진하겠단다. 걱정이 태산이다.
김누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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