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누가 생각나서..정치인과 선글라스의 '불편한 진실'

◐ 에피소드 1
청와대 한 관계자는 지난 8월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회자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박근혜 대통령을 수행해 해상 재난현장을 방문했을 때였다. 따가운 햇살이 수면에 반사돼 현장에서 배포된 자료문서를 읽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대통령 옆 선글라스 착용은 금기(禁忌)였다.
◐ 에피소드 2
민주당이 국가정보원 개혁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장외투쟁에 돌입했던 서울광장. 곳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거나 손을 이마 앞으로 들어 올려 해를 가리는 야당 의원들이 눈에 띄었다. 천막당사가 세워졌다지만 초가을 한낮에 탁 트인 공간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수시로 거리 홍보전과 각종 집회에 참석해야 했다.
'강렬한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색깔 있는 안경.'
선글라스, 우리말로는 색안경의 뜻풀이다. 사전적 의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멋을 내기 위해서 쓰는 경우도 많다. 여기까지만 보면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 실용품이고 패션 소품일 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에게 선글라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기간 박 대통령을 닮은 여성이 출산하는 듯한 그림으로 논란이 일었다. 이 그림에서 갓 태어난 아기는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었고 당연히 박 전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돼 파장이 더욱 커졌다.
박 전 대통령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던 순간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모습으로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등장했다. 쿠데타 직후 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청 앞에서 당시 박종규 소령, 차지철 대위 등 무장한 군인들을 뒤에 세우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시가행진을 지켜보는 흑백사진은 격동기 현대사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이후에도 박 전 대통령은 선글라스를 애용했다. 심지어 1961년 미국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글라스 낀 박 전 대통령. 누구에게는 국가 경제가 초고속 성장을 했던 시기로 추억되는 반면 다른 누구에게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된 암흑기로 다가온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통해 독재, 권력, 꿍꿍이, 카리스마 등 부정적이거나 강렬한 이미지를 연상한다는 것은 대체로 공통적이다.
독재자가 쓴 선글라스는 대중이 '허튼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독재자의 시선을 감춰서 그의 마음속을 읽을 수 없게 하고, 상대방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을 의식·검열하도록 만든다. 범죄혐의자들을 취조할 때 활용되는 한쪽에서만 보이는 특수유리와 같은 원리다. 현재까지도 정보기관 요원, 경호원 등이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이유와도 같다.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34년이 지났고 민주화도 됐지만 그가 남긴 '박정희 콤플렉스'는 아직도 한국 '권력자'들에게 선글라스를 기피하게 만드는 셈이다. 여기에 최근까지 선글라스에 독재 이미지를 한층 덧칠한 인물들도 있다. 2011년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시종 선글라스를 꼈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김 위원장과 동갑내기였고 공교롭게 같은 해 사망한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 등 해외 사례도 많다.
이런 와중에 선글라스를 적극 애용한 '용감한' 정치인도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박 대통령과 당내 대선후보 경선을 두고 치열하게 맞붙었던 2006년 선글라스를 낀 모습으로 화제가 됐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자꾸 누구(박 전 대통령) 닮았다고 이야기가 나오는데 딸이 사준 거라 어쩔 수 없이 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취임 이후에도 이 전 대통령의 선글라스 사랑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 전 대통령의 선글라스 복장은 그의 대선 승리에도 기여한 것으로 분석됐다. 10년간 집권하지 못했던 보수층 사이에서 박 전 대통령 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국가지도자로 각인됐다는 평가다. 아울러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였고, 경제성장의 향수를 간직한 중도층에게까지 선글라스와 '경제 대통령' 구호는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인들이 선글라스 착용한 사례
한국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선글라스를 착용한 경우는 박정희·이명박 전 대통령 사례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휴가지 등에서 자유와 여유를 만끽할 때 쓰이고 쇼를 위한 소품으로 활용된 적도 드물게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7월 말 선친과의 추억이 깃든 경남 거제시 저도에서 취임 이후 첫 여름 휴가를 보냈다. 당시 페이스북에 선글라스 쓴 모습을 직접 올렸다. 렌즈는 옅은 보라색에 테는 크고 둥그런 여성용 디자인이어서 박 전 대통령이 연상된다는 의견은 별로 없었다.
두루마기 한복에 흰 고무신 차림으로 유명했던 강기갑 전 통합진보당 대표는 지난해 정계를 떠난 뒤 선글라스 차림으로 언론 인터뷰에 등장했다. 본업인 농사로 돌아가 트랙터 위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국회의원 시절인 2011년 4·27 재·보궐선거 기간 분당을 유세지원에서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최고위원 신분으로 빨간색 셔츠에 선글라스 낀 모습으로 유세차에 올라 트로트를 열창했다. 현장에서 청중을 불러 모으는 한편 분당을 선거에 관심이 쏠리는 효과를 얻었다.
지난 3월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의원실 트위터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군용 전투화와 유사한 구두까지 신은 '공항패션' 사진을 올렸다. 정치 중립을 위반한 혐의로 고소·고발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출국을 직접 감시하고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민주당이 원 전 원장의 출국을 도피성으로 규정한 직후 일종의 퍼포먼스였던 셈이다.
외국은 상대적으로 선글라스에 대해 자유분방하고 정치인들도 수시로 착용한다. 햇빛을 가린다는 실용적인 목적과 함께 정치적인 메시지로도 활용된다.
특히 독재정권 경험이 없는 미국의 정치인들은 선글라스를 통해 오히려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1961년생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선글라스 애호가로 스포츠 활동에서 고글을 쓴 모습 등을 자주 보이며 젊고 활동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지난 6월 트위터 계정을 개설하며 선글라스를 낀 채 스마트폰을 보는 사진을 프로필로 설정, '세련된 커리어 우먼'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 밖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선글라스 복장으로 사냥을 하거나 오토바이를 타면서 '강하고 남성적인 러시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전직 정보기관 요원답게 선글라스가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재임 시절 모델 출신 부인 브루니 여사와 함께 '커플 선글라스'를 선보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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