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네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충남 논산시 성동면 한 마을의 '아물지않은 상처'

2010. 6. 2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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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서 숨진 민간인 숫자, 아무도 모른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남한에서만 37만3599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최대 100만명이 희생됐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군인의 총탄과 폭격, 그리고 이념이다. 인민군 치하에선 좌익이 우익을 학살하고, 국군 수복 후엔 우익의 복수가 벌어졌다.

충청남도는 전쟁 발발 26일 만인 1950년 7월 21일 전략적 요충지 대전이 함락되면서 인민군 손에 넘어갔다. 국군이 충남을 다시 장악한 것은 같은 해 9월 28일 서울 수복 직후다. 우에서 좌로, 좌에서 우로 세상이 바뀌는 동안 오랜 이웃이 좌우로 갈려 서로 총칼을 겨눴다. '충남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 활동이 활발했던 논산시 성동면은 그 상처가 특히 깊다.

전쟁이 끝나고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동안 성동면 주민들은 '그때 일'에 대해 굳게 입을 닫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진상조사를 포기했다. 지난주 And 취재팀이 성동면 한 마을에 갔을 때도 사람들은 경계하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그러다 박학윤(82·가명) 박윤철(61·가명)씨가 익명을 전제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들의 부탁대로 이 글에 마을 이름을 적지 않았다. 두 사람 신원이 유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 이 마을에선 동의할 사람이 많지 않다. 네 조부와 내 부친이 서로 죽이고 죽은 땅에서 친구와 원수의 경계는 흐릿하다. 마주치는 모든 이가 과거와 닿아 있다. 기억을 버리고 입을 닫는 것만이 이 공간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쟁 당시 좌익에 몸담았던 학윤씨. "예전엔 서먹했는데 이젠 감정이 풀렸다"더니 긴 인터뷰를 마무리할 무렵 결국 "(우익 후손들과)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고 털어놨다. 남들 눈을 피해 한밤중 마을 어귀에서 인터뷰에 응한 윤철씨는 컴컴한 논두렁에 몸을 감추고서야 무거운 입을 뗐다.

충남 논산시 성동면 ○○리. 60년 전 인민군이 퇴각한 음력 8월 16일이면 온 마을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충남의 모스크바

일제시대 학윤씨 마을은 가난했다. 농사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여덟 마지기 논을 소작했다. 여덟 마지기면 1600평인데 실제론 1100평이 채 안됐지만 소작료는 1600평치를 받아갔다. 항의하면 논을 빼앗겼고, 자살하는 소작농도 있었다.

"이제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이 열린다."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마을에 들어온 좌익 인사들의 주장에 열일곱 살 학윤씨는 솔깃했다. 옆 동네 대지주 아들도 좌익이었는데, 소작농들에게 자기 땅을 공짜로 나눠줬다. 성동면 2500가구 중 18가구 빼고 모두 좌익이 됐다.

그래도 갈등은 심각하지 않았다. 좌우익이 서로 따돌리는 수준이었다. 좌익이 대부분이던 마을 사람들은 우익 주민들에게 품앗이를 해주지 않았다. 우익은 마을에 찾아온 우익청년단체 서북청년단을 불러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학윤씨는 북한 공산당과 연계된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에 가입했다. 민청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을 민애청 부위원장을 거쳐 성동면 민애청 부위원장이 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좌익 단속이 심해졌다. 집을 떠나 서울에서 고물장수로 숨어 지내던 그에게 6·25전쟁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신호였다. 고향에 돌아가니 민애청 간부들은 모두 죽거나 잡혀가고 없었다. 조직을 다시 일궜다.

충남을 장악한 인민군은 좌익 청년들에게 면마다 한 명씩 김일성대학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학윤씨가 뽑혔다. 김일성대학에 가려면 먼저 간부교육을 받고 혁명사업을 도와야 했다. 50년 8월, 20일간 교육을 받고 천안시 옥천면의 충남도당 조직지도원이 됐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사업이 공평하게 진행되는지 살펴보는 자리였다.

좌익의 학살…우익의 복수

인민군 사령부는 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후퇴 명령을 내렸다. 각 지역 공산당 조직과 좌익 청년들에게는 "유엔군 진입 때 보탬이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소집단별로 피신해 기다리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음력 8월 16일(양력 9월 27일). 마을에서 학살극이 벌어졌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윤철씨도 그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철들고 나서 마을 어른들께 물어봤지. 첨엔 그때 얘기 꺼내지도 못혔어. 친해지면 슬쩍 물어보고, 그 앞에선 못 적고 집에 와서 적어두고, 다시 가서 또 물어보고 그렇게 십여년 하니까 그날 뭔 일이 있었는지 알겠더라고."

윤철씨가 뒷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12가구 49명이네." 음력 8월 16일 좌익은 후퇴하면서 우익 주민 49명을 죽였다.

"지령이 내려왔다더라고. 그래서 싹 죽였댜.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망치로 내리찍고 돌로 치고…. 어린애들도 모두. 사람이 어찌 그렸는지 몰러. 여기가 씨족 부락이여. 가까운 친척은 아녀도 한 핏줄이나 마찬가진데 그런 짓을 혔더라고."

학윤씨는 이 일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했다. 그는 마을 근처 대둔산에 피신해 있었다. 산에 모인 인원은 2000여명. 인민위원회 농민동맹 민주여성동맹 민애청 등 좌익단체에 속한 500여명과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1500여명이다. 열흘 정도만 기다리면 다시 공산당 세상이 된다고들 했다.

대둔산에 간 사람 중에는 좌익 활동을 하지 않던 이도 많았다. "옆집이 짐 싸기에 따라왔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빨갱이로 몰릴까봐 마을로 돌아가지 못했다.

윤철씨는 "울 아버지는 뒤늦게 산으로 가셨다더라고. 우익 주민 학살 때 연루되지 않으려고 집을 나가서 대둔산으로 가셨다는데 행적을 모르니…. 아버지 제사를 그냥 다른 희생자들처럼 음력 8월 16일에 지내는 거여."

학윤씨가 조심스레 같은 마을 한 친구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박구철(가명)이라고…나랑 먼 친척뻘인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작은아버지 두 분 내외, 동생 등 가족 10명이 좌익에 몰살당한 친구가 있어. 음력 8월 16일 우익 학살 때."

구철씨의 또 다른 작은아버지는 당시 부산으로 피란 가 살아남았다. 그는 국군이 마을을 장악한 뒤 고향에 돌아와 부모형제 원수를 갚는다며 강성 우익 주민들과 함께 좌익 사람들을 찾아내 죽였다고 한다. 학윤씨 아버지도 그때 우익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학윤씨가 대둔산에 있을 때다.

49명 목숨을 앗아간 좌익의 학살은 하루에 이뤄졌지만, 우익의 복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산에 들어갔거나, 다른 마을로 도망했거나, 집 다락방에 숨어 있던 '빨갱이'를 붙잡으면 몽둥이질부터 한 뒤 경찰이나 군에 넘겼다. 이 과정에서 맞아죽거나 즉결 심판으로 처형당한 좌익 주민이 45명 정도라고 한다. 윤철씨가 마을 어른들에게 이리저리 물어 파악한 숫자다.

학윤씨는 대둔산 빨치산 생활이 지옥 같았다고 했다. 처음엔 민가에서 식량을 사거나 얻어먹다가 나중엔 약탈을 했다. 굶어죽는 사람도 나왔다. 그는 1년 만인 51년 9월 5일 하산했다. 마을 근처 밭에 굴을 파고 숨어 지내며 어머니가 갖다 주는 찐쌀로 연명했다.

육군상사인 외당숙이 휴가 나오면 함께 자수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데 식량 나르던 동생을 수상히 여긴 주민 신고로 한 달 만에 발각됐다. 굴 안에서 수류탄을 들고 온종일 경찰과 대치하다 차마 자살할 용기가 없어 투항했다.

강경경찰서에 끌려가니 함께 산에서 내려왔던 좌익 주민들이 여럿 있었다. 경찰은 목숨을 건지려면 '보아라 부대'에 참여하라고 설득했다. 빨치산 출신으로 구성된 '빨치산 토벌대'다. 학윤씨는 거부했다. 자신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아내가 자살한 터라 아무 의욕이 없었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전향을 권유받았지만 버티다가 64년 8월 15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해 마을로 갔다. 산에서 내려온 지 13년 만이었다.

"위령비? 아직 멀었어유"

53년 7월 전쟁이 끝나고 10여년간 마을은 어수선했다. 좌익이던 집은 숨도 쉴 수 없었다. 윤철씨는 "좌익의 후손은 아이가 밖에서 얻어맞고 와도 아무 말 못하는 분위기였다. 좌익단체 고위간부로 활동하다 인민군 따라 월북한 아들을 둔 노인이 있었는데, 몇 해 버티다 결국 고향을 떠나 전라도로 갔다"고 했다.

출소한 학윤씨는 마을에서 1㎞ 남짓 떨어진 곳에 터를 잡았다. 어떻게든 고향에 자리를 잡으려고 "미친 듯이 일만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무조건 잘했다"고 한다. 과거 좌익 소탕에 앞장섰던 이들조차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은 쉽게 정돈되지 못했다. 응어리진 상처는 음력 8월 16일 제삿날마다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윤철씨는 "나 어릴 때는 제삿날이면 (좌우 주민들이) 서로 소리 지르고 싸웠다"고 했다. 우익 49명이 학살된 이날은 좌익 주민 상당수가 산으로 피신하거나 월북해 행방불명된 날이기도 하다.

지난 14일 마을은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주민들은 낯선 기자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다"거나 "그런 일 잘 모른다"고 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다른 지역과 정서가 달라 지금도 옛일을 말하기 꺼린다. 삼촌과 조카처럼 아주 가까운 친척끼리도 적대시한 과거 때문에 상처가 심한 곳"이라고 말했다.

학윤씨에게 구철씨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내가 구철이보다 항렬이 하나 높아. 그 집안에 남자가 별로 없어서 내가 대소사를 많이 거들어줬지. 그 부모 납골묘도 내가 해줬고. 서먹했는데 이젠 괜찮아."

구철씨는 학윤씨에게 우익 학살 당시 자신이 겪은 일도 털어놨다. 가족이 몰살될 때 혼자 도망쳐 들판을 헤매다 외가에 숨었다는 이야기. 떠올리기 싫은 옛일을 나누는 사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어쩔 수 없는 벽이 있다.

"우리 둘을 함께 인터뷰하겠다고? 음…그건 좀 불편해. 나는 주책이 없어서 이런 인터뷰도 하지만 그 사람은 절대로 안 할 거야. 아직도 상처가 깊은 거지. 둘이 같이 있을 때 혹시 그때 얘기가 나오면 '시대가 그렇게 만든 거지'라고 말은 하는데, 그래도 편한 맘은 아냐."

좌우익 후손들은 지금 한마을에 산다. 윤철씨는 이런 '공존'이 가능해지기까지 "엄청난 세월을 살아냈다"고 말했다.

비슷한 좌우 갈등으로 2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전남 나주시 다도면 주민들은 다음달 위령비 건립식을 갖는다. 6·25전쟁의 좌우 민간인 희생자들을 함께 기리는 자리다. 원수지간이라며 공동 위령비를 반대했던 후손들은 결국 화해했다. 성동면의 이 마을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위령비? 그런 거 세우면 큰일 나유. 아직은 안 돼유. 겉으로 품앗이 잘 허고 막걸리도 같이 먹는디 속으로는 서운한 감정이 있지유. 지금 들춰내면 또 한번 난리가 나유. 어쩌다 한번 그때 얘기 나와도 서로 조심하고 입 닫고 사는디." 윤철씨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난 다 알어유. 누가 누굴 죽였고…다 정리해 놨어유. 나중에 내가 더 나이 먹어 그 얘기를 다 하기 위해서 정리해 둔거여. 우리 마을 다시는 이러지 말자, 그러고 그때 위령비 세워야지, 아직은 멀었어유. 아직은."

논산=글·사진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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