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지붕킥 동반 죽음' 누굴 가르치려 드나
[데일리안 김헌식 문화평론가]드라마 <추노>에서 왕손이와 최장군을 살려내는 연출자의 노력은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결말에서는 주요 주인공의 비극적 죽음으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어느새 사극 전문 연출자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 이병훈 PD는 "석세스 스토리는 한국의 시청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코드"라고 말한 바 있다.
거꾸로 이를 피해간다면 텔레비전 매체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의 사극들이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획일적 결말의 맥을 이어왔다. 이는 한국의 고대소설이 대체적으로 권선징악과 행복한 결말을 보이주기 때문에 전통의 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비극적 결말을 보였던 드라마 <한성별곡-정>과 <자명고>는 모두 시청률 확보에서 참패했다. 물론 이러한 드라마는 영화와는 다른 장르적 특성을 보인다. 영화는 목적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비극적 결말과는 관계없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목적 의식이 약하고, 대리만족이나 유희적 관점이 매우 강하다고 하겠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전략은 비극적 결말을 감추고 희극적 장치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비극적 암시를 내세웠다면 결과는 참담했을 것이다.
다만, <지붕 뚫고 하이킥>은 다른 장르와는 다른 특징 때문에 비극적 결말이 주는 충격이 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선 생각해야할 점은 <지붕 뚫고 하이킥>이 시트콤이라는 사실이다. 시트콤은 유리속의 유희 공간이다. 아무리 슬픈 일도 시트콤이 펼쳐지는 공간에서는 모두 유쾌한 상황으로 그 맥락이 달라지고 만다.
따라서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은 애초에 수용자들이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거침없이 하이킥>이나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주인공이 죽음을 맞은 적이 있기 때문에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보인 죽음 자체가 그간 보여 온 김병욱 시트콤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점이 다르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붕뚫고 하이킥>에는 여성주의와 계층의식이 결합한 상태에서 현실도피와 대리충족의 심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랑의 주인공들이 동반의 비극적 결말을 맞은 것은 또 다른 현상이었다. 이지훈을 둘러싼 신세경과 황정음의 구도는 이러한 점을 확인하는 데 압축적이었다.
신세경은 신(新)빈곤층 젊은 여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반면 황정음은 비록 현실에서 우울한 처지였지만, 살아남아 결국 성공스토리를 이루어낸다. 처음부터 신세경은 비극적 삶을 잉태하고 있었고, 어쩌면 이는 한국의 사회 모순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극적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하는 황정음의 인기는 바로 한국의 많은 여성들이 대리 투영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었다. 이지훈과 황정음의 로맨스는 이러한 대중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신세경을 외면한다면, 너무 현실 안주적이 된다. 더구나 한국사회에는 신세경과 같은 이들이 의외로 많다.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는 소수자의 반영에 관한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비극적 결말은 자원을 고르게 분배했다. 신세경이 죽음을 통해 이지훈을 가졌고, 황정음은 이지훈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살아남아 현실적인 성공을 갖게 되었다.
연인이 인생을 바꿀만한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현실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안정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자아실현과 성공이 현대 젊은 여성의 더 큰 소망이 아닌가. 애초에 그러한 꿈의 성취와 성공을 가질 수 없었던 신세경은 자신이 정말 갖고 싶었던 이지훈을 가졌다. 결말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현실적인 조건의 무용함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지훈은 최고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조건들도 죽음 앞에 무용하며 결국 황정음 처럼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러할까. 신세경, 황정음, 이지훈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어차피 유희의 공간 시트콤에서 수용자가 욕망하는 것은 현실적 판타지다. 그러나 그것은 충족되지 못했다. 기존의 김병욱 표 시트콤보다도 더 극단적인 논란에 휩싸인 이유다. 현실적 욕망이 너무나 투영된 인물들이 한순간에 비극적 결말을 맞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수용자의 꿈과 욕망이 박탈된 것과 같다.
<지붕뚫고 하이킥>은 99%의 희극에 1%의 비극의 구성비를 보였지만, 1%가 100%를 대변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어차피 비극적 요소가 강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수용자라면 당연히 해피엔딩을 원하겠다. 연출자가 계몽군주처럼 시청자에게 현실을 새삼 일깨울 필요는 없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가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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