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대탐구 한국의 성경②] 조선末 배포 주역 '권서'

2008. 7. 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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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지금까지 제가 한 복된 소식이 이 책 안에 있습니다. 자, 성경책 한번 보세요." "돈이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보슈."

"아이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보리쌀도 괜찮고 계란도, 짚신도 좋습니다."

"글쎄, 나는 글을 모른다니까요."

"아, 그럼 제가 글을 가르쳐 드리지요."

봇짐에서 ㄱ, ㄴ, ㅏ 등 갖가지 한글조각을 꺼낸 사람은 친절하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보리쌀 반 되를 받고 성경책을 판다.

"제가 다음 장날 다시 올 터이니 성경을 잘 읽어보시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성경번역의 주인공은 서양선교사였지만, 조선 민중들에게 성경을 전해준 것은

권서(勸書, Colporteur, 책을 권하는 사람)였다. 이들은 성경배포의 주역으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전도활동을 펼친 숨은 '영웅'이다.

성경번역자가 배포까지=1880년대 당시 조선은 외국 종교 서적의 유입을 엄금하고 있었다. 그래서 존 로스는 1882년 3월 김청송을 통해 한글성경 배포가 가능한 만주 서간도부터 우선 보급했다. 백홍준과 그의 친구들도 의주 지역에서 무보수로 성경전달자 역할을 자청했다. 로스는 의주에 있는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성경을 요청하자 그 해 서상륜을 영국성서공회의 권서로 파송한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의 권서가 탄생하게 된다. 서상륜의 서울지역 권서활동은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 2년간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상인이나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한 신자들이 생겨나게 됐다.

이성하도 1883년 평양에 들어가 성경을 전했는데 이것은 토머스 목사의 순교 이후 17년 만에 재개된 전도로 의미가 깊다. 이성하가 서울에서 활동하던 서상륜에게 전해준 400권의 복음서는 서울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초기 권서들은 로스, 매킨타이어와 함께 성경을 번역한 조선인들이었다. 이응찬과 백홍준, 서상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수세자들은 로스와 함께 성경번역에 참가했고 그 성경을 직접 조선으로 가져와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서 씨를 뿌리기도 전에 김을 매고 '추수'까지 하는 즐거운 상황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보다 몇 년 앞서 성서공회는 은둔의 왕국에 들어갔고 로스의 열정적인 노력에 의해 한글판 신약성서가 만들어졌다. 그 책들은 장돌뱅이와 권서들, 그리고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통해 평양을 거쳐 서울까지 들어갔다… 선교사들은 의주와 평양에서 말씀에 의해 정결하게 된 적지 않은 신자들을 발견하였다."(털리 선교사의 'Ping Yang in Korea', 1895)

교회사에 유례없는 성경배포=선교사들이 실제적 활동을 하기 이전에 벌써 권서를 통해 2만권에 이르는 성경과 기독교 소책자가 배포됐다. 이것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없는 일로 조선인의 문화수용 능력과 개신교의 주체적 출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권서들은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외국인 선교사들이나 전도자들이 가본 적이 없는 마을에 들어간다. 그리고 길이든 여관이든 들이든 집이든 대화가 될 만한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어디서든 성서의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성서와 단편을 판다. 권서들의 활약으로 마을 전체가 선교사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우리 마을에 한번 들러주세요. 우리 믿는 이들을 하나로 모아 교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는 벌써부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이런 급박한 호소에 선교사들이 부응하지 못할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운지 말할 수 없다.'(번커 선교사의 'Bible Society Record', 1911)

성경보급을 통해 조선에는 이미 잠재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돼 있었으며, 이런 바탕 위에 1887년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가 세워진다. 권서들은 전국을 돌며 교회를 세웠다. 하디 선교사는 "남감리회가 1896년 이래로 약 12년간 개설한 225개의 교회가 대부분 권서들에 의해 이뤄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권서들은 전도자나 조사(helper)를 거쳐 신학교에 진학해 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부흥운동의 불쏘시개 '권서'=초기 권서들은 종교적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년) 이후 성경배포를 위한 여행이 자유로워졌다. 당시 권서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등 국가적 위기에 따라 사회적 불안이 종교적 욕구를 유발시킨 데다 각 교파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했기 때문이다. 성경보급은 성경연구 모임인 사경회 운동으로 연결됐다. 1890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불붙기 시작한 사경회는 권서들이 전한 '예수셩교젼셔'가 촉매제가 됐다.

조선 땅에는 1907년 이후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권서들이 활동했다.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1940년까지 활동한 권서의 수는 2000여명으로 추정된다. 권서제도는 대한성서공회의 감독 아래 1972년까지 운영됐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는 "한국기독교 초창기에는 교회와 목회자가 많지 않아 성경과 복음을 전한 권서의 역할이 무척 컸다"면서 "숱한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권서들은 자신의 사역에 충실해 초기 한국교회 부흥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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