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장인' 영의정 심온, 덧없이 떠나다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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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강궁 임금의 자리 |
| ⓒ2006 이정근 |
수강궁에서 장고에 들어갔던 태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행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불같은 성미여서일까?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척살하고 수송방에서 정도전을 벨 때처럼 태종의 행동은 전격적이다. 숨 돌릴 겨를이 없다. 명령을 수행하는 신하들의 숨이 턱에 찰 지경이다.
1418년 11월 13일. 대사헌 허지를 불러 "의금부에 나아가 박습을 국문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죄인을 심문하는 의금부 제조 유정현에게 보고받으면 될 일인데도, 대사헌 허지에게 직접 챙기라고 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전옥서에 갇혀 있는 죄인을 끌어내라
그때까지 심문은 진상조사 차원이고 이제부터는 원하는 답, 즉 시나리오에 맞는 모범 답안을 받아오라는 것이다. '좌 허지, 우 최윤덕'이라고 불릴 만큼 허지는 태종의 심복이었다. 전옥서에 갇혀있던 죄인을 끌어내어 심문을 시작했다.
죄인으로 심문을 받는 처지지만 병조판서 박습이나 병조참판 강상인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르고 윽박지르고 곤장을 쳐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강상인은 심문자 이각을 비웃었다. 당황한 쪽은 죄인이 아니라 심문하는 금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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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하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던 수강궁 회랑 |
| ⓒ2006 이정근 |
보고를 받은 태종은 압슬형(壓膝刑)을 명했다. 압슬형, 이거 보통 고문이 아니다. 군사정권 시절 전기고문이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라고 지탄받았지만, 압슬형에 비하면 그래도 신사적인 고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버지를 역적으로 지목하고 아들을 역적의 하수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압슬형이다.
사금파리를 깔아놓은 자리에 죄인의 무릎을 꿇게 한 뒤, 그 위에 압슬기나 돌을 얹어서 자백을 강요하는 압슬형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잔인한 고문이다. 다른 형벌의 경우 혼절하거나 숨이 멈추면 죄인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지만, 압슬형은 생명과는 관계없이 고통만 더하는 고문이다.
천하장사도 못 견디는 압슬형
압슬형은 1차에 2명, 2차에 4명, 그래도 불지 않으면 3차에 6명이 달라붙어서 가한다.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빨리 죽이라고 애원하게 만드는 고문이다. 심문자가 죄인의 고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원하는 답을 받아낼 수 있는 악랄한 고문이다.
"군사(호령)는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네가 말했지?"
"예."
"박습도 옳다고 말했지?"
"예."
압슬형을 3번째까지 견디던 강상인이 4번째는 견디지 못하고 자백한 내용이다. 3번 이상의 압슬형은 법으로 금지했지만, 갈 길이 바쁜 심문자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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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강궁의 고목나무 |
| ⓒ2006 이정근 |
그 험한 압슬형을 3번째까지 견뎌낸 강상인도 독한 사람이다. 죄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른 말을 하면 모범답안을 들이밀고 압슬형을 가하니 끝내는 "예, 예"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음날에도 고문이 계속되었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몸은 만신창이가 된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의 아우 심청(沈泟)이 튀어나왔다. 아니, 튀어나온 게 아니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예, 예" 대답하고 보니 심청이 등장한 것이다.
이제는 심청 차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날이 금형일이었다. 이명덕이 태종에게 금형일에 죄인을 다룰 수 없다고 말했다. "병이 급하면 날을 가리지 않고 뜸질을 하는 법이다. 이것은 큰 옥사이니 늦출 수 없다." 금형일을 무시하고 강행하라는 태종의 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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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강궁에서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길 |
| ⓒ2006 이정근 |
심청은 이를 악물고 압슬형을 견뎌냈다. 자신과 형 심온, 그리고 가문의 존폐가 걸린 문제이기에 죽을 힘을 다해 참았다. 하지만 이렇게 견딜 수 있는 고문이라면, 누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고문이라고 말하겠는가. 심청도 견디지 못하고 2차 압슬형에서는 모범답안을 말하기 시작했다.
"군사(호령)는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된다고 네 형 심온이 말했지?"
"예."
"형의 말에 너도 옳다고 말했지?"
"예."
굿판이 끝났다. 원하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명덕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더 이상 심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푸닥거리만 남았으니 굿판을 치우라는 얘기다. 다음날(11월 25일), "심온을 잡아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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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서원 |
| ⓒ2006 이정근 |
이튿날. 전옥서에 갇힌 죄인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당시 사형에는 교형, 참형, 능지처사가 있었고 능지처사에도 오살과 육시, 거열이 있었다. 그 외에 사사와 부관참시가 있었다. 박습과 이관, 심청을 참형에 처하고 강상인을 거열하라는 명이었다.
인왕산 범바위 계곡에서 발원해 도성 밖 서쪽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물줄기가 있다. 욱천이다. 한양과 경기도를 구분하는 경교 밑을 지나 서소문 밖 후미진 곳을 통과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다.
돈의문 앞에서 개천을 따라 연결된 길과 서소문 언덕길로 연결되는 지점엔 숲이 울창했다. 삼거리에는 나그네가 쌓아놓은 서낭당과, 이름 모를 묘지가 듬성듬성 있었다. 음산하고 괴기스러워 백성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은 길이다. 도성에서 삼개나루터로 통하는 지름길이다. 출동하는 군졸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백성들은 조금 돌아가더라도 만리재를 넘어 숭례문을 많이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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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각 |
| ⓒ2006 이정근 |
11월 26일. 사형집행일이다. 형률에 따라 서교 삼거리에서 박습과 이관, 심청의 목을 베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절명한 박습의 목도 벴다.
종루 저자거리에서 푸닥거리가 펼쳐졌다. 문무백관이 참관하고 수많은 백성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강상인을 거열하기 위해서였다. 강상인의 손과 발을 묶어 달구지에 걸었다.
사지를 묶어 달구지에 걸어라
살아있는 사람을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도 참혹한 형벌이다. 사지를 밧줄로 묶어 달구지에 연결한 뒤, 소나 말을 네 방향으로 출발시켜 인체를 찢는 형벌이다. 참관한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권력자의 힘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린 반인륜적인 처형이다.
압슬형으로 만신창이가 된 강상인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밧줄에 묶인 채 울부짖었다.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때리는 매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는다."
압슬형에 견딜 사람은 없다. 천하장사도, 항우장사도 안 된다.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서도 알고 있었기에 1665년(현종 6년) 법으로 사용을 제한하다가 1725년(영조 1년) 영구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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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강궁 별당 |
| ⓒ2006 이정근 |
의주에서 체포된 심온은 칼을 쓰고 함거에 올라 남행했다. 갈 때는 가마 타고 가는 길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덜컹거리는 소달구지 길이다. 산천은 의구한데 신세는 달라져 있었다.
흔들리는 수레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청운의 꿈을 안고 벼슬에 나가 부귀영화도 누렸다. 44년 생애에 여한은 없지만 대역죄로 죽는 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갈 때는 영광의 길, 올 때는 죽음의 길
수레 속도가 빨라진다. 달구지가 내리막길에 접어든 모양이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봤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평탄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오르는 길은 힘들었다. 하지만 내리막길에선 내려가는 게 아니라 천 길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는 격이 아닌가?
'내 비록 죄인의 몸으로 압송되고 있지만 한양에 가면 진실은 명명백백 가려질 터. 강상인과 대질하면 내 혐의는 벗겨지겠지.' 허나, 이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상왕은 심온과 강상인의 대질은커녕, 심온 체포령을 내린 이튿날 강상인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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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송부원군 심온의 묘. 묘비는 세종의 아들이자 심온의 외손자 안평대군이 지었다. |
| ⓒ2006 이정근 |
흔들리는 함거에서 심온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임금의 장인이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내가 왜 죽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도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만백성을 내려다보고 오로지 한 사람을 올려다보는 영광스런 자리인 영의정을 일컫는 말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을 곱씹던 심온은 등줄기를 흐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현실은 어떤가? 인정전에 주상이 있고 수강궁에 상왕이 있잖은가? 이인지하(二人之下) 만인지상 아닌가? 그렇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말이 덫이었단 말인가?
12월 22일. 심온이 압송돼 한양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왕 태종은 의금부의 우두머리 인 제조 유정현이 아니라 대사헌 허지와 이명덕에게 의금부에 나아가 심온을 심문하라고 명했다. 강상인을 심문할 때처럼, 필요한 답안지를 받아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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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강궁 명정전. 지붕 위에 지붕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
| ⓒ2006 이정근 |
심문이 시작됐다. 왕비의 친정아버지이고 영의정이라고 해서 봐주는 건 없었다. 매로 치고 압슬형을 가했다. 영의정의 산 같은 위엄은 산산이 부서졌다. 자존심도 철저하게 짓밟혔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심온은 순순히 모범 답안지를 제출했다.
"강상인 등 여러 사람이 아뢴 바와 모두 같습니다. 신은 무인(武人)인 까닭으로 병권을 홀로 잡아보자는 것뿐이고, 함께 모의한 자는 강상인 등 여러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22일)
막을 내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심문도, 고통도 마감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불과 4개월 전 상왕이 선위할 때, 세종의 머리에 익선관을 씌워주며 태종이 문무백관에게 천명한 말이 있다.
"주상이 아직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軍事)는 내가 친히 청단할 것이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육조로 하여금 함께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할 것이며, 나도 함께 의논하리라. 병조 당상은 나에게 시종하고 대인들은 주상전에 시종하라."(<세종실록> 총서)
이에 어긋나는 자백을 받아냈으니 더 이상 심문할 필요가 없었다. 이튿날 진무 이양에게 심온을 수원으로 압송해 자진(自盡)하게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말이 자진이지, 사사(賜死)나 다름없었다. 체포령이 떨어진 것은 11월 25일, 심온이 목숨을 끊은 것은 12월 25일. 딱 한 달 간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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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인릉. 태종이 잠들어 있는 곳에 무인석과 문인석이 시위하고 있다. |
| ⓒ2006 이정근 |
250여년이 흐른 현종 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집어던진 이익은 <성호사설> '인사문'에 이렇게 기록했다. "민씨와 심씨 두 집안이 태종에게 흉화(凶禍)를 당했으나,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
588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정근 기자
덧붙이는 글수강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궁입니다. 성종 14년(1483)에 중건하였으며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수하여 동궐이라 불렀습니다. 일재시대에는 창경원으로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창경궁이라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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