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가장 따뜻한 책'.. "아무렴,사람보다 꽃이 아름다울까"
하나는 갈색머리에 반항적이었고 하나는 금발에 다소곳했다.
하나는 20세기 문학사와 여성운동사에 걸출한 족적을 남긴 작가가 되었고, 하나는 8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남긴 여류 화가가 되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와 동생 엘렌 드 보부아르(1910〜2001). 뛰어난 재능에 반항심이 강했던 시몬에 비해,온순한 성격의 엘렌은 늘 언니의 그늘에 가려진 영원한 둘째였다.
그러나 상반되고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매는 남성적 권위에 눌려 평생을 한숨과 체념으로 살았던 어머니 시대의 여성관을 부정하며 열렬한 생을 욕망했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사학자인 클로딘 몽테유는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보부아르 자매의 운명을 통해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페미니즘적 각성과 여성 운동에 대한 진정한 통찰에 이르는 단초를 제공한다.
파리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시몬은 고등학교 때 이미 세계 속에 창조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나의 첫째 가는 행복은 이른 아침,제일 먼저 푸른 초원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잔걸음으로 걸으며 나는 책을 읽었고 대기의 서늘한 기운이 부드럽게 살갗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세계의 아름다움과 신의 영광을 나는 홀로 감당하고 있었고,그리고 위장 깊숙이에는 초콜릿과 구운 빵의 매혹이 있었다.
” 시몬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언어들을 잉크로 기록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시하고 빈정대거나 비난을 퍼붓는 광경을 보면서 성장한 시몬은 부르주아 사회의 위선적이고 획일적인 도덕과 가치관에 강한 회의를 품으며 이렇게 결심한다.
“나의 인생은 다른 것이 되리라.”시몬은 자신이 쓴 습작 소설을 엘렌에게 읽어줬고 엘렌은 거기에 맞춰 삽화를 그렸다.
엘렌은 곧 위대한 화가들의 역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렌의 열정은 언니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루브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엘렌은 이후 물감과 붓의 세계로 몰입했지만 뒷날 그녀는 스스로 털어놓았듯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이에 비해 시몬은 소르본 대학 시절에 이미 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결심했다.
“모든 경계와 모든 구분을 부정할 것,자신의 계급으로부터 빠져나올 것. 이러한 지령들은 나를 전류처럼 뚫고 지나갔다.
나는 열에 들뜬 듯 집으로 돌아왔다.
내 자신을 넘어서 나는 한 드높은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삶은 복무하여야 한다! 내 삶에서 모든 것은 쓰여야 한다.
’”시몬은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사르트르를 만났으며,엘렌은 피카소의 호평 아래 첫 전시회를 연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두 자매는 헤어진다.
리스본에서 사르트르의 제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리오넬 드 룰레와 결혼한 엘렌은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회를 열지만 언니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했다.
이후 시몬과 엘렌은 서로 합류하고,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시몬과 사르트르는 안락하고도 평탄한 생을 영위하는 엘렌과 리오넬 부부를 ‘부르주아지’라고 못마땅하게 여겼고,두 동서 간은 정치적 신념의 차이로 사이가 원만치 못하였다.
그러나 피는 자유보다 진한 것일까. 두 자매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서로를 아껴주었다.
계약 결혼은 혈연의 가족이 아니라 자유에 입각한 진정한 가족을 선택하는 일종의 자유 행위였지만 저자는 시몬과 사르트르 사이에도 끊임없이 기존의 혈연이 개입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르트르와의 관계 조차 심드렁해진 쉰 다섯살의 시몬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동생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다.
“어스름한 빛 속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내 묵은 회한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나는 내 청소년기에 단절되었던 대화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꺼져버렸다고 믿었던 옛날의 다정함이 되살아났다.
”동생은 언니의 성공(1954년 ‘레 망다랭’으로 공쿠르 상 수상)과 언니의 명성을 진심으로 축복했고 늘 언니를 지지했다.
특히 1980년 사르트르의 죽음을 맞았을 때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시몬도 엘렌의 그림을 좋아했고,엘렌이 전 세계에 걸쳐 갖는 전시회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1986년 4월 14일 사망한 시몬의 장례식에서 엘렌은 흐느끼며 중얼거린다.
“칠십육년동안 나를 보호해 주었는데 이제 나는 어떡하란 말인가?”파리 몽파르나스 대로변의 집 발코니에서 유명해지기를 꿈꾸던 두 자매의 일생에는 사랑과 질투,경쟁과 매혹,정치적 갈등이 숨은 그림처럼 박혀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매력은 1970년대 초반부터 시몬과 함께 페미니스트 투쟁을 벌인 저자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해 보부아르 자매에 대한 특별한 증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1년 엘렌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저자는 땅 속에 묻힌 두 자매를 다시 생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강한 욕구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멀어져 가면서 나는 시몬과 엘렌이 내게 물려준 힘을,살아가는 힘을 생각했다.
함께한 순간들이 다시 떠올랐고 묘지에서 떠나오기 전 내가 완수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시몬과 엘렌은 사라졌으나 나는 그들을 다시 생으로 데려오고자 하는 욕구를 느꼈다.
이튿날 새벽,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 전기의 시작을 알리는 글이다(클로딘 몽테유・실천문학사・서정미 옮김・9500원).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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