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 칭기즈칸, 인디언도..블랙홀 민족주의
[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편집자 주 중국은 고구려사 강탈을 목적으로 한 "동북공정"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정(프로젝트)"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역사빼앗기를 넘어서 최근 중국의 패권주의적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
<오마이뉴스>는 중국이 왜 이같은 작업을 벌이고 있는지, 또 그들이 노리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내보낸다. <오마이뉴스>는 이를 위해 지난 9월 3일부터 18일까지 2주일간 중국현지를 답사했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다. / ▲ 지난 2002년 6월 "붉은악마"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치우천황이 그려진 대형 깃발을 들고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다. ⓒ2004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는 "치우천왕"이 그려진 대형 깃발을 들고 한국팀을 열렬하게 응원했다.
붉은악마는 "우리민족 배달국의 14대 천왕이자 전쟁의 신으로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며 "우리 민담에 나타나는 도깨비는 치우천왕의 변형이다, 치우천왕은 한국 축구의 승리를 상징하는 결연한 표식"이라고 설명했다. 시인 김지하는 치우를 고조선의 전쟁신으로 보기도 하는데, 아무튼 치우는 월드컵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역동성과 진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더 강하게 인식됐다.
전설에 의하면 치우는 고대 동이족의 군장으로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갖추고 있으며 모래와 돌, 쇳덩이를 밥으로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치우는 청동기 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은나라 유물에서 나오는 "도철"이라는 괴물, 또는 신라 때의 귀면와(鬼面瓦) 등이 치우의 모습이라고 한다.
치우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오늘날 한족(漢族)들의 조상신인 황제와 탁록(현재 베이징시 북서쪽 120㎞ 지점)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탁록의 싸움에서 황제가 승리함으로써 중원을 차지했고 중화문명이 형성됐다고 본다.
고대 중국인들은 치우를 흉폭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했다. 황제는 치우에게 원한이 많아 그를 사로잡아 죽인 뒤 머리와 몽뚱이를 따로 분리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중국인들은 황제, 염제와 함께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이라며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만들어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유적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고구려유적과 함께 지난해 7월1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청 영릉. 누루하치 조상들의 묘와 사당이 있다. ⓒ오마이뉴스 김태경 지난 7월 1일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세계문화유산대회에서 중국은 고구려 유적 뿐 아니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선양 고궁과 역대 황제릉 3개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켰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들 유적들은 모두 만주지역에 있다.
선양 고궁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644년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점령하기 전 후금(後金)으로 불린 시절에 만들었다.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황타이지가 주로 이용했고 3대 황제 순치제도 여기에서 즉위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청나라 역대 황제릉은 3개다. 먼저 영릉(永陵)으로 청나라의 시조 누루하치의 고향인 랴오닝성 신빈현(新賓縣)에 있다. 영릉에는 누루하치의 6대조, 조부, 부친, 백부, 숙부 등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다음은 선양에 있는 복릉(福陵)으로 청 태조 누르하치의 무덤이다. 마지막은 역시 선양에 있는 소릉(紹陵)으로 청 태종 황타이지의 무덤이다.
현재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은 21개다. 이외에 자연유산이 4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중복되는 게 4개, 문화경관이 1개다. 문화유산 가운데 소수민족이 남긴 것은 선양고궁과 청 영릉 등 3곳, 티벳의 포탈라 궁, 윈난성의 리강 고성,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만든 윈깡 석굴 등이다. / 동이족의 군신 치우, 그러나 중국에서는... ▲ 중화삼조당 안에 모셔져 있는 치우상(맨 앞쪽). 가운데가 황제, 뒤쪽이 염제의 상이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지난 9월 6일 <오마이뉴스> 취재팀은 중화삼조당을 찾아나섰다. 오전 7시에 베이징을 출발했지만 도중에 길을 잘못들어서는 바람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가 넘었다.
중화삼조당에 도착했을 때 정문 현판에 쓰여진 글씨는 "귀근원(歸根苑)"이었다. "뿌리를 찾아 돌아오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정문 왼쪽에 있는 바윗돌에는 "삼조 문화를 널리 떨치고 민족단결을 촉진하자"는 지난 2000년 1월에 쓴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의 친필 휘호가 새겨져있었다.
중화삼조당은 귀근원 정문에서 정면으로 200m 쯤 떨어진 곳에 있다. 건물 50m 정도 앞에는 "홍콩 귀근비(歸根碑)"와 "마카오 귀근비"가 서있다.
한 여성 관리직원은 "한국인들도 가끔 이곳을 찾는다"며 "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성화가 여기에 안치될 것"이라고 자랑했다. 지난 2003년 2월 중국올림픽조직위원회와 베이징시 등은 중국문명의 발전과 중화민족의 단결을 상징하는 귀근원의 중화합부단(中華合符壇)을 올림픽 성화의 안치 및 봉송지로 결정했다.
귀근원 전체 면적은 35.5㎢로 1994년 공사에 착공해 1996년 9월 정부의 정식 승인을 받았고 1998년 7월 외부인들에게 정식 개방했다. 현재 국가 AAA급 경관구로 중국인민대표자회의 및 인민정치협상회의 관계자들이 220여 차례 찾는 등 모두 100여만 명이 이곳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핵심 시설은 공사비만 1000만위안(16억원)이 들었다는 중화삼조당이다. 안에는 높이 4m 가량의 황제 좌상이 가운데에 있고 왼쪽에 치우, 오른쪽에 염제의 좌상이 있다. 4면의 벽에는 황제와 염제가 싸웠다는 판천지전(阪泉之戰), 치우와 황제가 싸웠다는 탁록지전(水+豕鹿之戰) 등을 묘사한 4개의 대형 벽화가 그려져있다.
비록 신화상이지만 과거의 철천지 원수였던 이들은 이제 중국인들한테 공동으로 향불을 받고 제삿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칭기즈칸 빼앗길 위기처한 몽골공화국 ▲ 중국 국영 중앙방송인 CCTV에서 방송중인 역사 드라마 "징기스칸". 사진은 DVD로 재생한 화면을 찍은 것이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지난달 12일 밤 북한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있는 중국 단둥의 단둥국제호텔에서 TV를 틀자 CCTV(중국 국영 중앙방송)에서 역사극이 방송되고 있었다. <칭기즈칸>이라는 드라마였다.
칭기즈칸의 탄생에서부터 전 세계 정복까지를 다룬 30부작 대형역사물로 제작비만 6000만위안(약 90억원)이 들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중국어로 말하고 제작진들도 모두 중국인들이다. 이미 DVD로도 발매됐다. 250위안(약 3만6000원)을 주고 전집 DVD를 사서 보니 뒷면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있었다.
"서기 13세기는 대지가 뒤엎어진 세기, 전쟁의 세기, 그리고 400여년간 분열됐던 중국이 4번째로 통일된 세기였다. 중국은 폐쇄 상태를 타파하고 진정으로 역사무대에 나섰다. 이 모든 일은 한 위대한 이름과 함께 일어난 것이니 그가 바로 중국과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몽고족과 중화민족의 영웅 원 태조 칭기즈칸이었다."중국 북쪽에 칭기즈칸의 진짜 후손들인 몽골공화국이 있다. 몽골정부와 외국 학술단체들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기위해 수십년째 발굴 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천연덕스럽게 칭기즈칸을 빼앗고 있었다.
몽골사 전문가인 박원길 박사는 "중국이 칭기즈칸도 중국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벌써 20년이나 됐다"며 "최근에는 헝가리도 중국 땅이라고 주장한다. 근거는 헝가리가 흉노의 후예라는 것"이라고 밝혓다.
심지어 남북 아메리카의 인디언도 중국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용봉문화원류"(출판사 동문선)의 저자 왕따여우(王大有)는 "미주 지역의 올메카, 마야, 아즈텍, 잉카 문명 등은 중화문명이 동천하여 이룩된 것"이라며 "아메리카 인디언은 중화민족과 같은 조상, 같은 뿌리로 중화인종의 후예"라고 말하고 있다.
베이징시 저우커우디엔(周口店)에서는 지난 1929년 20만~70만년전의 화석이 발견됐다. 이른바 베이징 원인이다. 같은 지역의 동굴에서 1933년 1만8000년전의 남녀 8명명의 인골화석이 발견되었다. 이른바 "산정동인(山頂洞人)"이다. 중국학자들은 "산정동인이 중국인, 에스키모인, 아메리카 인디언 등 현 몽골인종의 조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자오춘칭(趙春靑) 등이 쓰고 한국어로 번역된 <문명의 새벽>(출판사 시공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한・주중 미국 대사를 지낸 제임스 릴리는 지난 9월 2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남중국해의 한 섬에서 깨어진 고대 중국 도기의 사금파리 조각을 발견하고는 그 섬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한다"며 "그걸 기반으로 중국은 대만을 비롯한 남중국해 전부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릴리의 말은 중국인들의 행태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중국이 고구려사가 자기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고주몽이 중국인의 후예라는 것이다. 논리는 단순하다. "삼황 오제 가운데 하나인 전욱 고양씨의 성이 고씨인데 고주몽의 성이 고씨다, 따라서 고주몽은 중국인이다"라는 것이다.
중국과 조금이라도 연관 있으면 "메이드 인 차이나" ▲ 중화삼조당에 그려진 치우의 모습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중국의 이런 사고방식은 흡사 우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는 블랙홀과 같다. 중국과 비슷하고 그들과 약간이라도 연관성이 있으면 무조건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를 붙인다. 더구나 이것이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되면서 "블랙홀 민족주의"는 더욱 더 거세지고있다.
후손들이 분명히 있는데 중국인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은 거의 "유전자 조작" 수준이다.
이같은 중국인들의 태도를 융합력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중화민족은 한족(漢族)을 비롯한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졌다고 중국은 주장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핵심은 항상 한족이다. 나머지 민족은 한족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장(州長)은 재중동포이지만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공산당 서기는 한족이다. 소수민족 자치지역의 모든 권력은 한족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 중화삼조당에 그려진 황제의 모습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삼조당의 경우 한가운데 한족이 추앙하는 황제가 자리잡고 있다. 치우와 염제는 좌우 양쪽에 있어 마치 황제를 모시는 것 같다. 4면에 그려진 벽화도 황제는 문화인으로 그려져있지만 치우는 표범 가죽 옷을 걸치고 돌 도끼를 들고있다.
우실하(문화사회학) 박사는 "삼조당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중심"이라며 "치우는 신화상 청동기 문명을 상징하는데 돌도끼들고 다니는 야만인같이 그려놓았다"고 지적했다.
삼조당 안 4개의 벽화 가운데 "부산합부"(釜山合符)라는 이름의 그림이 하일라이트다. 황제가 탁록의 싸움에서 이긴 뒤 부산에서 제 씨족과 종족의 대 연맹을 만들었고 이는 이후 중화민족의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는 중화민족의 융합과 단결, 화해, 통일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상 황제는 치우를 잡아죽였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몽뚱이와 머리를 따로 잘라서 오늘날 산둥성의 수장현과 거야현에 따로 버렸다는 것이다. 치우가 죽은 뒤에라도 혹시 다시 일어날까봐 걱정한 것이다. 염제는 황제에게 패한 뒤 오늘날 남방으로 밀려났다고 중국 신화는 전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런 내용은 슬쩍 빼고 한족들의 연맹체를 구성한 것을 마치 치우와 염제까지 포용한 것처럼 신화를 재창조한다.
칭기즈칸이 중화 민족이라는 논리 속에서는 몽골의 중국 점령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한족과의 충돌은 슬쩍 사라진다. 고구려와 수, 당과의 싸움이 내전으로 슬쩍 바꿔치기 당하는 것과 비슷하다.
중국인들은 몽골인들을 몽고족(蒙古族)이라고 부른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아주 오래된 멍청이"라는 욕이다. 원래 발음은 몽골이지만 중국인들이 이들을 멸시하기 위해 몽고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현실에서 정치적 영토 확장 근거 마련치우, 칭기즈칸 등을 중화민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심리상의 만족감 때문이 아니다. 이들을 중국인으로 만들면 역사적 영토를 확보할 수 있다. 역사적 영토는 언제든지 현실에서 정치적 영토의 확장으로 이어지거나 그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치우가 중화민족의 선조라면, 치우를 숭상하는 한민족도 중화민족의 후예 또는 그 하나라는 논리로 연결된다. 물론 한반도도 중국 땅이 된다.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면 대동강 이북 땅에 대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칭기즈칸이 중국인이 된다면 그와 후손들이 정복했던 모든 나라가 중국의 영토였다는 사고로 이어진다.
베이징에서 만난 한국 회사의 주재원인 최 아무개씨는 "중국어를 쓰는 칭기즈칸이 TV 드라마에 등장한 것을 봤을 때 정말 기분이 묘했다"며 "중국인들은 과연 그 드라마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뻔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1993년 쓰촨성 출신의 런민(人民)대학 3학년생이 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중국의 땅은 지금이 역사상 가장 넓다"고 기자가 말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칭기즈칸의 원나라 때가 가장 넓었다"며 "그때는 오늘날 중동지역과 러시아, 동유럽도 모두 중국 땅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몽골공화국은 중국은 몽골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런 말에는 펄쩍 뛴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중국인의 후예라면 현재의 미국 땅 역시 중국이 수복해야할 지역이 된다. 산정동인이 몽골인종의 선조라면 전 아시아인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중국인을 형님으로 모셔야한다.
중국은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으로 중국의 시간적 역사 영토를 5000년 전, 나아가 1만년 으로 끌어올리고있다. 치우나 칭기스칸을 중화민족으로 편입시켜 중국의 공간적 역사 영토를 확장시킨다. 중국의 영토확장 작업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중국인이 점령하기 시작하는 고구려유적 관광 ▲지난 7월 집안의 고구려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뒤 내건 축하 플래카드. 9월 중순까지 여전히 걸려있었다. "올해 9월까지 집안과 환인에 온 한국 관광객은 한 6000명, 일본 관광객은 100명 정도, 중국 관광객은 1만3000명 정도 됩니다."집안에 있는 한 관광회사 관계자의 말이다. 집안과 환인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이제 한국인들을 추월하기 시작한 것이다. 9월 12~14일까지 집안과 환인에 머물고 있는 동안 한국 관광객보다 훨씬 더 많은 중국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중국 정부와 언론의 대대적인 선전에 힘입은 바 크다. 7월 1일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확정되자마자 20일까지 21일간 대규모 행사가 벌어졌다.
중국 전역에서 3만명의 중국인들이 집안에 초대됐다. 이 때문에 집안시내는 물론 1시간30분 떨어진 통화시내 호텔방까지 동이 났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관광객들은 사우나에서 잠을 자야했다. 사우나 휴게실도 사람들이 넘쳐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자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중국정부는 중요한 회의를 의도적으로 집안에서 열고 있었다. 중국 정부의 전력부, 수리부, 농업부를 비롯해 9월초에는 26개 성 인민대표자들의 회의가 집안에서 열렸다. 9월 초 집안에 취재를 갔을 때 당시로부터 1주일 뒤 길림성 기자단 72명이 집안을 방문해 집단 취재가 예정되어 있었다. / /김태경 기자- ⓒ 2004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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