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기 펄럭이는 운동장 기억나나요?

한성희 2002. 9. 13.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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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어릴 때 손을 꼽아가면서 달력을 들여다보던 기억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즘 들어 초교에서 열리는 가을 운동회를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학생수가 많은 도시에서는 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힘들고 옛날처럼 한 달 이상 운동회 준비로 어린이들에게 연습시키다간 학부모 항의가 빗발치니 이래저래 소풍으로 때우거나 간소한 체육대회 형식으로 끝내기 일쑤다. 운동회가 점점 사라지는 것은 시골도 마찬가지. 해마다 열긴 힘들고 그나마 2-3년에 한 번 정도 하면 나은 형편.@IMG1@ 그러나 "추억의 운동회"라면 뭐니뭐니 해도 시골 초등학교가 제격이다. 전날 밤하늘을 보며 행여나 비가 올까 가슴 조이고 달리기에서 공책 타는 꿈을 꾸며 겨우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이면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서 하늘부터 쳐다보던 기억 한 조각씩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리라.연습 내내 입고 싶었던 고무줄 들어간 까만 운동팬티에 흰 운동 셔츠를 입고 머리에 청군백군 띠를 매거나 운동모자를 쓰고 무용에 입을 옷, 응원도구를 챙겨 학교 가까이 가면 스피커에서 경쾌한 행진곡이 요란하게 온 동네로 울려퍼지곤 했다.

음악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 저절로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교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고대하던 광경. 만국기가 줄을 이어 화려하게 펄럭거리는 운동장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게 보이고 행진곡은 베토벤의 교향곡보다 더 감격스러웠다. 우리가 하교한 뒤에 선생님들이 애쓰고 걸어놓은 만국기며 개선문을 바라보며 얼마나 기뻤던지. 운동장에 하얗게 금을 그어놓은 달리기 코스도 멋있었다.

그렇게 일찍 학교에 갔어도 우리보다 아니 선생님보다 먼저 와서 자리잡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애들 호기심과 침을 삼키게 하는 장난감과 군것질거리를 펼쳐놓은 장사들이었다.

@IMG2@이러한 신나는 운동회라도 내게는 운동회 날이 다가오면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달리기에서 3등이라도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상품으로 주는 공책이 1등은 세 권, 2등은 두 권, 3등은 한 권인데 공책 한 권이라도 타서 집에 가서 자랑하고 싶은 그런 소망은 번번이 무산되고 동생들이 타온 "상"이라고 도장 찍힌 공책을 부럽게 바라보던 기억."성희야 이번에도 공책 한 권 못타왔니? 또 4등이냐?"운동회 때마다 엄마가 웃으며 놀리면 "4등 했는데..." 우물쭈물 대답이 기어들어가서 주눅이 들었다. 그때는 소운동회, 대운동회로 나누어서 치르곤 했는데 소운동회라는 건 진짜운동회인 대운동회가 열리기 전에 이른바 연습해보는 운동회라서 등수에 들어가도 상품이 없었다. 소운동회 때는 3등하던 달리기가 왜 대운동회 때면 꼭 4등을 하는지?그것만 아니면 운동회는 즐겁고 신나는 날이었다. 아침에 용돈으로 탄 돈을 움켜쥐고 번데기, 소라, 솜사탕, 뽑기, 색깔이 화려한 눈깔사탕이 널려 있는 가운데 "뭘 사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 조악한 장난감이지만 입에 대고 불면 말렸던 비닐튜브가 주욱 펴지는 피리며, 팽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보였던 반지, 유리구슬 목걸이 등등. 사고싶은 건 많고 돈은 적고…. 그뿐이랴, 점심때는 맛있는 반찬에 김밥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IMG4@구경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저씨, 아줌마들도 그 날은 축제일이라서 점심을 싸들고 새옷을 차려입고 먼길을 걸어와 일찌감치 학교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온 동네의 축제가 바로 시골 운동회날인 셈이다.

엄마에게 무용하는 거 꼭 보라고 오른쪽 몇 째 줄, 앞에서 몇 번째가 나라고 일러주며 무용하는 거 봤냐고 묻던 기억도 아련하다. 똑같은 옷을 입은 그 많은 단발머리 애들 중에 엄마가 나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왜 못했는지….공 굴리기, 기마전, 고전무용이 운동장에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운동장 둘레에 달리기 코스를 따라 하얗게 금을 그어놓은 출발선에서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출발 준비를 한다.

@IMG3@총소리를 쏘아대는 선생님과 소리 지르며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응원하는 고함소리, "와아" 일어나는 함성과 호루라기 소리가 뒤섞여 온종일 운동장이 떠들썩하다.

이윽고 운동장 한가운데는 청색과 백색 종이로 만든 커다란 공이 매달린 장대를 6학년 남자 애들이 잡고 서 있다. 일 학년 어린이들이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청군백군으로 양쪽에 줄 서 있다. 아이들은 시작 신호에 맞춰 달려나가 손에 준비한 작은 모래주머니를 들고 청색과 백색의 공에 향해 던지기 시작한다.

쩌억! 바구니가 양쪽으로 갈라지면 오색 종이가 푸른 하늘에 나부끼며 기다란 종이가 매달린다.

@IMG5@"맛있는 점심 시간입니다."이제 기다리던 점심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동네 아저씨도 "볏가마오래들기" 등을 하면서 보낸 오후 시간은 잘도 웃음과 고함 속에 지나간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면 운동회 마지막 순서로 릴레이가 시작된다. 운동회의 가장 인기종목은 릴레이 경주다. 운동장 가까이에 모두 둘러서서 소리소리 지르며 응원하는 릴레이가 끝나면 화려한 축제, 운동회도 막을 내렸다.

만년 4등 하는 바람에 공책 한 권 타지 못하고 6년 내내 청군으로만 배정돼서(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있을까) 항상 이기는 백군에게만 주는 국회의원의 도장이 찍힌 공책도 못타보고 그렇게 나의 초교 운동회는 끝났었다.

봉일천 초교의 가을 운동회운동회가 거의 열리지 않는 요즈음, 11일 봉일천 초교(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서 열린 운동회는 지난 추억에 돌아오기에 충분했다.

@IMG8@청군과 백군으로 나누던 여느 운동회와는 달리 청군과 홍군으로 나눈 것이 특이했고 지난 월드컵 때 거리를 누볐던 붉은 물결을 연상시키는 붉은 티셔츠 차림의 어린이들이 응원하는 모습이 색달랐다.

천영숙 교장의 설명은 누구나 한 벌씩 장만하고 있던 붉은 셔츠를 다시 활용하는 의도에서 홍군을 정한 것이라 한다. 맨손 달리기, 기마전, 공 굴리기, 모래주머니 던지기에 이은 점심 시간은 예전과 변함 없는 메뉴.5,6학년 여학생들의 화려한 부채춤, 장애물달리기, 차전놀이 등등 운동장에서 고함소리와 음악소리도 별 다를 게 없었다. 행진곡 대신에 신세대 템포 빠른 음악들로 바뀐 것은 있다. 붉은악마 티셔츠와 붉은 머릿수건을 쓴 귀여운 3학년들의 에어로빅은 신세대다운 메뉴였고 남자 어린이들이 더 춤을 잘 춘다는 웃음 섞인 학부형들의 말소리도 들렸다.

@IMG6@ @IMG7@ 비디오 카메라까지 동원해 운동장으로 나가 애들의 모습을 담으려는 엄마들의 극성스런 사진 촬영이 색다른 풍경. 김재호 교감도 학교 홈피에 올리려고 열심히 카메라에 학생들의 모습을 담았다.

엄마들의 달리기가 시작되자 응원하는 어린이들의 함성과 관전하던 사람들의 웃음이 운동장을 진동했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달리는 용감한 엄마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뒤를 이어 아빠들의 달리기에도 구두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달리는 모습도 예전과 다른 풍경.학부형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선생님은 현장 곳곳에서 지키고 서 있고 어머니들이 진행을 맡아보는 것도 이채롭다. 학용품이 흔한 요즘은 공책을 상품으로 줘야 학생들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상품인지라 공책 대신에 금은동 메달로 준비하고 시상대를 만들어 우승자에게 교장선생님이 목에 직접 걸어줬다.

@IMG9@ 이 메달효과는 만점이라 메달을 따려고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서 달리기연습을 하는 어린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 겨울에는 감기도 안 걸릴 것 같다며 체력 증진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천영숙 교장은 흐뭇해한다.

중절모를 쓰고 구경하던 할아버지나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손뼉치던 할머니의 모습은 없었지만 운동장에서 떠들썩한 함성과 웃음, 운동회를 보며 함께 공유하는 즐거움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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