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벚꽃 같아 더 슬펐던, 무대 위 스타” [기억저장소]
가족과 동료 배우, 연출가가 전한 주씨의 삶
“언니, 커튼콜은 해야죠.”
지난 4월 4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연극배우 주선옥(사망 당시 38세)씨의 “퇴근하고 싶다”는 농담에 조연출이 이렇게 말했다. 선옥씨는 조연출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 커튼콜은 해야지. 커튼콜 하려고 연기하는 건데.”
조연출 옆에 앉아 있던 연출가 한민규(39)씨는 선옥씨의 답을 곱씹으며 무대를 바라봤다. 일주일 뒤에 첫선을 보일 연극 ‘지옥에서’의 2막 연습이 곧 시작될 참이었다.
‘지옥에서’는 전염병에 휩싸인 인류를 구하기 위해 과학자 ‘유진’이 ‘실험자’ 4명을 대상으로 항체 실험을 진행하는 내용이다. 550명이 몰린 오디션에서 주·조연 5명을 뽑았고, 그중 한 명이 선옥씨였다. 선옥씨는 1막에서 실험을 받다가 사망하는 실험자 역할을 맡았다.
2막 연습이 시작되고 2~3분쯤 지난 뒤 극 연출에 집중하던 한씨는 “아!” 하는 짧은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선옥씨의 것이었다. 2막에 출연하지 않아 대기 중이던 선옥씨가 1막의 숨지는 장면처럼 쓰러져 있었다.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현장에 있던 관계자 50여명이 선옥씨에게로 뛰어갔고, 누군가가 119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도착한 소방대원은 선옥씨의 상태를 살피자마자 “뇌출혈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현장에 있던 이들 모두 큰 충격에 휩싸였다. 정작 누워 있는 선옥씨의 표정은 잠에 든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지난 2일 서울 모처에서 만난 한씨가 들려준 그날의 기억이다. 병원으로 이송된 선옥씨는 뇌출혈로 인한 뇌사 판정을 받고 4월 11일 심장, 폐장, 간장, 좌우 신장, 좌우 안구를 기증해 7명의 생명을 살린 뒤 세상을 떠났다.
선옥씨는 어릴 적부터 손으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잘했다고 한다. 생계를 꾸리느라 딸과의 추억을 거의 갖지 못했던 주법종(66)씨도 그 ‘자랑스러운’ 사실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법종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사생대회나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매번 1, 2등을 해오곤 했다”고 말했다.
맏딸에 아들 하나. 슬하에 둔 어여쁜 남매를 법종씨 부부는 마음만큼 살뜰히 보살피지 못했다고 했다. 폐플라스틱을 수거하며 버는 돈으로는 네 식구가 먹고살기에 빠듯했다. 부부는 매일 이른 새벽에 나가 자정을 넘겨 돌아왔다. 법종씨는 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기억에 남는 게 많이 없다”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선옥씨는 그런 환경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딸이었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에 다녔고, 졸업 후에는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사서로 근무했다. 법종씨는 “사서로 일하면서도 대본을 써서 공모전에 당선되고, 연극을 올렸나 보더라”며 “취업하고 3년쯤 지난 뒤 일을 그만두고 배우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니까 반대할 것도 없었죠. 딱 한 번 선옥이가 연출한 연극을 보러 갔는데 겉으로 표현은 안 했어도 속으로는 대견했어요. 자기 앞길은 자기가 잘 찾아서 가니까….”
자타가 공인하는 ‘기쁨 빼면 시체’인 사람. ‘타고난 배우’ 혹은 ‘주 스타’로 불렸던 사람. 악보는 볼 줄 몰랐지만 멜로디를 흥얼대며 작곡을 했고, 여유시간에는 시나 대본을 썼던 다재다능한 배우.
동료 배우 최지수(32)씨는 선옥씨를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그에게 선옥씨는 ‘배우가 아닌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선옥씨에 대한 연출가 한씨의 평가도 “넘치는 끼를 다 펼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운,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은 배우”다.
‘지옥에서’ 오디션 때도 선옥씨의 재능은 빛났다. 선옥씨는 ‘자유연기’ 순서가 오자 젬베 등 각종 악기와 입으로 다양한 소리를 내며 독특한 연기를 선보였다고 한다. 한씨는 “마치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 같은 연기였다”고 말했다.
선옥씨의 개성은 ‘실험자’ 캐릭터에 대한 연출가의 생각도 변화시켰다. 당초 한씨는 항체 실험을 당하는 역할에 걸맞게 왜소한 캐릭터를 연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소 체격이 있지만 유연하면서도 날렵한 선옥씨를 본 뒤 실험자 4명의 이미지를 각각 다르게 설정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한씨는 “실험자 캐릭터를 재창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선옥이”라고 설명했다.
선옥씨는 연극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배우였다. 소속된 극단도 ‘달을 만드는 씨앗’ ‘종이로 만든 배’ ‘꼴통’ 등 다양했다. 특히 청소년에게 관심이 많아 자신이 직접 쓴 대본으로 청소년 연극을 올린 적도 있었다. 연극 낭독회 등 여러 봉사활동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대안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목표도 있었다.
지수씨는 “꿈이 많았던 언니를 생각하면 찬란하게 만개했다가 순식간에 져버리는 벚꽃이 생각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선옥씨가 떠난 4월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이었다. 따스한 봄처럼 그의 장례식은 수많은 동료 배우들이 자리한 가운데 ‘화기애애’하게 치러졌다. 지수씨는 “다들 언니와 관련된 일화를 얘기하다가 울고, 웃고 했다”며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파티’ 같은 장례식이었다. 참 선옥 언니다웠다”고 회상했다.
지수씨는 ‘선옥 언니다운 일화’가 있다면서 7~8년 전 첫 만남을 언급했다. ‘철딱서니들’이라는 음악극의 첫 연습날이었다. 초록색 계열의 모자, 목도리, 옷을 입은 선옥씨가 한 손에 음료수 상자를 들고 등장했다고 한다.
선옥씨는 해맑은 미소를 띤 채 음료수를 한 병씩 건네며 선배 배우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눴다. 낯설어하는 지수씨 곁에서 자신이 겪은 재밌는 일화를 한참 동안 얘기해 주기도 했다. 지수씨는 “절 편하게 해주려는 언니만의 배려였던 것 같다”며 “친해진 뒤에는 반대로 언니가 항상 제 얘기를 들어줬다”고 말했다.
선옥씨가 장기기증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참 선옥이답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씨는 “‘지옥에서’는 ‘이런 곳에서라도 살아남을 방법은 공생’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장기기증도 일종의 공생이라고 생각한다. 선옥이는 마지막까지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덤덤하게 ‘선옥이답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과정이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니다. 선옥씨의 장례식 당시 세월호 10주기 연극에 출연 중이었던 지수씨는 “언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봐”라는 엄마의 말에 겨우 마음을 다잡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장기기증을 결정한 가족들은 여전히 슬픔을 견디고 있다. 법종씨 부부가 장기기증에 동의한 건 딸을 보내는 게 외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법종씨는 “딸이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며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열아홉 살의 한민규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했어요.”
‘지옥에서’의 오디션 당일 선옥씨가 한씨에게 했던 말이다. 선옥씨는 한씨가 쓴 청소년 도서 ‘너섬남고 문예부’를 읽고 오디션에 지원했다고 했다. 연극에 푹 빠진 10대 소년 한씨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책이었다. 한씨는 “선옥이의 말을 들었을 때 연극을 꿈꾸며 때로는 무너지고 도전하던 열아홉 살의 내가 위로받은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한씨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선옥씨를 추모했다. 지옥에서의 커튼콜 때 일렬로 선 배우들 한가운데에 빈 공간을 만든 뒤 핀 조명을 켰다. 마치 그곳에 선옥씨가 서 있는 것처럼. 선옥씨가 그토록 출연하고 싶어 했던 작품의 마지막 순간, 관객들의 찬사가 쏟아지는 그 순간에 함께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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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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