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전화 받은 10대 승객들... 길가에 차 멈춰 세운 이유

김지영 2024. 10. 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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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 운전사] 모든 아이들은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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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

 서울역에서 대기 중인 택시.
ⓒ 연합뉴스
지난 봄이었다. 서울 구로 쪽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10대 두 명이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동북쪽 시 경계 지역이었다. 둘은 친구로 보였지만 체격이 큰 아이가 기가 눌린 작은 아이를 동생이나 후배 취급하고 있었다. 붙들어 둘 곳을 찾지 못한 듯 항용 부산스럽던 둘은 폰으로 하는 도박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나는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써가며 거칠게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체격이 큰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경찰인 것 같았다. 전화기에 대고 아이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둘은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시설에서 가출 신고를 한 모양이다. 한두 번이 아닌 듯 아이는 전혀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태연하게 그리고 가끔 화를 내면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지금 택시 타고 그 동네로 가는 중이고, 약속이 있어서 당장은 들어가지 않을 거고, 저녁에 알아서 들어갈 테니 전화는 그만해도 된다고 고지했다. 다른 친구는 나와 함께 있고 그 친구가 통화하고 싶지 않아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3만 원 가까운 택시비를 카드로 결제하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차를 길가에 댄 채 잠깐 멈춰 섰다. 그 나이 때 보통 아이들과는 동떨어진 일상을 살고 보편적이지 않은 자기들만의 말과 행동이 몸에 밴 두 아이의 잔상이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지키지 못한 약속

1985년 봄, 대학 새내기였다. 마음씨 곱고 예쁘기까지 한 여학생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와 봉사동아리에 가입했다. 당시 남자들의 이상형은 청순가련형 생머리에 현모양처형 신사임당 상이라면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었다.

과연 환영회가 열리는 날 문을 열고 들어선 동아리 방에 오목하게 모여 앉은 여학생들은 하나 같이 청순하고 가련한 신사임당들이었다. 친구와 나는 감격했다. 우리는 그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되게 열심인 동아리 회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이었다. 캠퍼스 안에는 사복경찰들이 상주하며 감시했다. 그들의 눈을 피해 학살자 전두환을 고발하는 유인물이 살포되고 불법으로 간주된 집회 및 시위가 매주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날 교내 집회를 마친 행렬은 스크럼을 짜고 학교 밖 진출을 시도했고 일군의 전투경찰은 방패로 막아서고 최루탄을 쏘아댔다. 교문 안으로 쫓긴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고 서너 시간 치열한 공방을 벌인 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시민학살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의 폭압이 시민들의 일상을 짓누르고 있던 엄혹하고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때 대한민국은 동토의 땅이었다. 그나마 살아 꿈틀거리며 죽은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한 항전을 주저하지 않았던 곳이 대학이었다. 아직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이십 대의 순수가 생동하던 시절이었다.

전두환의 군인들 총칼에 죽어 간 광주 시민들의 훼손된 시신 사진을 대자보에서 처음 본 순간 스무 살의 나는 그 참혹함에 눈물이 비어져 나왔고 가슴에는 불이 일었다. 눈물을 훔치고 가슴에 난 불을 끄기 위해 나는 집회가 있는 어디든 혼자 찾아다니면서 돌을 던지고 화염병에 불을 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공지를 뒤늦게 발견하고 대절한 버스에 올라선 후에야 나는 도착지가 보육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동아리 회원과 보육원 아이가 일대일 결연을 맺고 정기적인 만남을 갖는 일종의 멘토링 프로그램이었다.
 일년 뒤에 오겠다는 엄마는 10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아이는 매년 그 날이 되면 습관처럼 보육원 정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만난 시설 출신 여성이 들려 준 친구이야기다. 감히 우리는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AI가 만든 이미지)
ⓒ 김지영
그날 나와 인연이 된 아이는 6~7살의 여자아이였는데 선천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부모 없고 눈도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녀를 생각했을 때 떠오를법한 불행의 표상은 간데없이 아이가 명랑했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안쓰러웠다.

그날 종일 아이와 시간을 보냈는데 아이는 익숙한 듯 처음 보는 나를 전혀 낯설어하지 않아 오히려 내가 당황할 정도였다. 조금 시간이 무르익자 아이는 내 얼굴을 만져봐도 되냐고 묻고는 얼굴 구석구석을 손으로 탐색했다. 아이의 주도하에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스무 살의 나는 부모도 없는데 눈까지 안 보이는, 중첩된 불행을 안고 살아야 하는 아이의 삶에 연민을 느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낯가림을 하지 않고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의 적극적인 행동도 안타까웠다. 부모의 전적인 보살핌을 받는 아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자 아이는 진심으로 헤어지기 싫은 표정을 짓더니 내게 다음 달에도 (꼭 와 달라는 표정으로)올 거냐고 물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꼭 올 거라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며칠 뒤, 혼자 집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던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선배가 강의실로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운동권 조직을 소개했고 가입하면 어떤 불이익이 예상되는지를 (예를 들어 가입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경찰에 붙잡히고 고문당할 수 있다는 것까지 충분히 고려하라고) 설명한 후 곧 만나서 결론을 말해달라고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놀고먹는 대학생에서 운동권이 되니 읽어야 할 책 목록이 수두룩하고 비밀리에 모여서 해야 할 공부와 토론 일정도 빠듯해졌다. 빈 병을 수집하고 신나와 휘발유를 사서 배합하고 심지를 넣고 철사로 고정해서 화염병을 만드는 것도 우리 일이었다.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운동권이 된 나는 신사임당이 즐비했던 동아리도 더 이상은 관심이 없어졌고 함께 가입하고 감격했던 친구와의 관계도 멀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모든 관계와 일상까지도 빠르게 단절되고 있었다.

경찰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움직이는 운동권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내 세계는 온통 거기에 함몰되기 시작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계는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졌지만 나는 (그게 정의로움을 선택한 당연한 운명이라는 생각에) 전혀 아쉽거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보육원 소녀와의 약속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 뒤, 손가락까지 걸었던 소녀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동아리 버스가 보육원으로 가는 그 시간 나는 시내 '가투'(가두투쟁, 거리 시위를 칭하는 운동권 용어)를 '오더' 받아 유인물로 가득 채운 배낭을 메고 경찰 검문을 피해 걸어서 시 중심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미안한 마음으로 회고되는 과거로 남아 있다. 어렸던 소녀도 지금은 40대 후반의 여인으로 어딘가 살아 있겠지만 부디 그녀의 지난 삶이 신산스럽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소녀에게 나는 당시 보육원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 이었을테지만 나에게 소녀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미안한 사람이다. 지켜지지 못한 소녀와의 약속은 그날 내 가슴에 아프게 새겨졌다.

18년 전, 귀농해 살던 집 주방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마에 칼질을 하던 그대로 아내가 내게 던진 말 한마디를 주저 없이 덥석 받아 든 것도, 오래전 내가 지키지 못했던 약속에 대한 뒤늦은 해후였는지도.

"여보, 우리 예쁜 딸 하나 입양할까?"

바로 다음 날 나는 가까운 도시로 나가 입양상담소를 찾았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우린 아내 말대로 태어난 지 27일 된 예쁜 딸아이를 품에 안았다. 낳은 부모가 사라진 딸에게도 엄마와 아빠와 오빠가 한꺼번에 생겼다. 조금은 다른 방식이지만 우린 그날 가족이 되었다.

가정 아닌 시설에서의 삶... 현실은 이렇다
 영아원의 모습. 만으로 36개월을 살다 입양이나 친권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보육원으로 가서 18세가 될 때까지 시설 아이들이 된다.
ⓒ 김지영
미국 심리학 교수인 셸리 테일러의 <보살핌>이란 책이 있다. 책을 사서 한 번 읽고는 책장에 꽂아 두는 게 보통이지만 잊을만하면 꺼내 다시 읽게 되는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하나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인간은 오직 유전자 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생물학적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셸리 테일러는 그것과 함께 다른 사람을 돌보고 보살펴 주는 행위 역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며 다양한 사회적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1990년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공산 체제가 몰락하면서 밝혀진 고아원 아이들의 실상은 끔찍했다. 서민 경제가 무너지고 출산 강제정책으로 부모들이 아이를 고아원 앞에 버리는 일이 많아지면서 소수의 고아원 직원들이 수백 명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다. 아이들은 음식을 배급받는 것 외에 다른 보살핌이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몰락하면서 굳게 닫혔던 고아원 문이 열리자 비로소 나타난 아이들 모습을 보고 세계가 경악했다. 제 생의 발달과정에서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이 결여된 채 집단생활을 하며 성장한 아이들이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머리를 벽에 쿵쿵 박거나 하는 이상 징후들을 보인 것이다.

아이들은 굶주리지도 신체적 학대를 당하지도 않았지만 단지 누군가로부터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썼다.

개인택시를 하기 직전 몇 년 동안 국회의원실에서 보호아동 관련 정책 및 입법 관련 일을 하며 보육원 출신 당사자가 만든 단체를 돕고 있었다. 덕분에 시설에 적을 두거나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도 하고 그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우리나라 보육시설의 실정도 어느 정도는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럴수록 가정이 아닌 시설에서의 삶은 그 시설의 훌륭함이나 원장님의 따뜻한 성품과는 별개로 한 사람의 전인적인 발달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퇴행적인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부모와 함께 사는 삶은 너무 당연해서 그게 없는 삶은 상상도 이해도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부모와 가족이 결여된 삶을 직접 살아보지 않았다면 그들의 어떤 말과 행동도 함부로 예단하고 평가해선 안 된다. 나는 그래서 택시에서 내린 두 아이가 보인 말과 행동이 속세의 기준으로는 나쁘게 평가받을지라도 아이들이 그렇게 된 데는 양육을 포기한 부모와 함께 부모를 대신해야 할 사회의 책임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앞에 겸허해진다.

아이들은 보고 배운 대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설 안에서 또래들끼리의 집단생활은 관리의 사각지대에서 그들만의 퇴행적인 체계와 질서를 구축하고 확장해 나가는데 거리낌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유감스럽지만 내가 만난 시설 아이들은 그 세계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아동복지 선진국들이 우리나라의 보육원과 같은 아동양육시설을 없애고 위탁가정 중심의 가정형 보호체계를 구축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시설이 훌륭하고 관리자의 교육이 철저해도 집단생활은 인간의 전인적 발달을 방해하는 최악의 환경이다.

'보호종료아동 자립실태 및 욕구조사(2020년,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보육시설에 한 번 들어간 아이의 평균 재원 기간은 10.9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인 장기 양육시설 보유국이 우리나라다. 유소년기 10년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인격을 완성하고 성인기 이후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다. 그 시기를 온통 시설 안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보낸다는 말과 같다.

당사자들에게는 더 참담한 통계가 있다. 과거와 달리 보육원은 고아원이 아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은 소수고, 대부분 아이들은 생물학적인 부모가 엄연히 살아 있다. 다만 그들로부터 직접 양육이 포기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부모가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현실이 통계로 확인된다.

2021년 보건복지부에서 김미애의원실(국민의힘/부산 해운대구을/재선)에 제출한 '아동보호양육시설, 그룹홈 친권자 교섭현황(2016-2020)' 자료가 있다.

2020년을 기준으로 235개의 아동양육시설 대상아동 10225명 중 전화 서신 면회 중 어떤 식이든 한 번이라도 부모나 가족과의 교섭이 이루어진 숫자는 43%인 4397명이었다. 반면, 57%에 해당되는 5828명의 아이에게는 전화 한 통 없었다. 또한 교섭 형식 중 89%는 전화였고 편지가 2%였는데 실제 얼굴을 대면하는 면접교섭의 경우 9%에 불과했다.

아이들에겐 가정이 필요하다
 아이는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
ⓒ unsplash
어떤 피치 못할 사연이 있어 내가 낳은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또 어떤 곡절로 아이를 만날 수도 없는 건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납득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사연과 곡절이 있을 테지만 아무런 힘이 없이 그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의 당사자는 상실과 체념과 공허로 어린 마음을 채울 뿐이다.

모든 아이들은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 유엔아동권리협약(UN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제9조에서 명시하고 강조한 원칙이다. 협약 당사국은 이 원칙을 기준으로 아동복지 정책을 수립하고 조직을 편제하고 예산을 지원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이 원칙에 동의하는 협약국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아동보호 정책의 중심은 가정형 보호에 있다. 그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조직을 편제하고 예산을 지원하므로 그 효과는 통계로 증명되어야 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1989년 11월 20일 유엔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대한민국은 1991년 12월 20일에 비준하여 조약당사국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하고 조약당사국이 된 1991년 이후 보호아동의 보호조치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일관된 정책 방향은 물론 가정형 보호에 있었다.

관련 통계는 6년 후인 1997년 시작되었다. 당시 한 해 발생한 보호아동 수는 8268명이었다. 이 중 입양이나 위탁 등에 의한 가정보호는 44%인 3367명이었고 시설보호는 이보다 많은 3928명으로 47%였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2023년, 우리나라에서 한 해 발생한 보호아동은 2054명이었다.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헤어져야 했던 2054명 중 보호조치가 필요한 아동은 1746명. 이 중 입양이나 위탁 등에 의한 가정보호는 54%인 945명이었고 시설보호는 801명으로 46%였다.

통계가 시작된 1997년 47%였던 시설보호율이 26년 후인 2023년 46%라는 건 사실상 국가적 정책으로 표방했던 가정보호 중심의 보호체계가 전혀 진전이 없었다는 방증이다. 지난 26년 동안 일관됐던 수립된 정책과 편제된 조직과 지원된 예산은 무엇을 한 걸까.

2023년 통계에 대한 의미분석 항목에 보건복지부는 올해 '전망 및 향후 정책방향'을 이렇게 썼다. 이는 내가 2018년 보호아동 관련 일을 시작한 이후 계속 보아온 문장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올해 전망하는 내년도 향후 정책방향에 지금 써진 그대로 다시 쓰일 걸로 예상한다.

'가정위탁 및 국내입양 활성화를 통해 시설보호 위주에서 가정중심의 아동보호정책으로 정책변화를 추진해 나갈 계획임(가정보호 우선 추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하고 조약 당사국이 된 1991년 그 해 추진을 시작한 가정중심의 아동보호 정책이 3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는 미래진행형으로 명시되어 있다.

지금 필요한 건 기존 시설 중심의 틀을 깨트릴 수 있는 구체적 실천 방안이지 실속 없이 표방되는 정책적 수사가 아니다. 한 사회의 도덕성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알 수 있다는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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