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죽인 안두희, 그의 입에서 나온 미국과 이승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3. 6. 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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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JTBC '듣고 보니 그럴싸' 권중희 편... 김구 암살 배후 밝히려는 국민의 노력

[김종성 기자]

5월 30일 밤에 방송된 JTBC <듣고 보니 그럴싸>에서는 정의봉이라는 몽둥이를 들고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추격한 권중희(1936~2007)의 일생이 소개됐다. 생전의 권중희를 취재하고 <오마이뉴스> 독자 성금으로 권중희와 함께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에 가 김구 암살의 진실을 쫓았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박도의 제보가 방송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관련기사: 백범 선생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http://bit.ly/19AUfx).
  
 권중희 선생(오른쪽)과 박도 시민기자가 '민족혼은 살아있다'라는 권중희 선생의 휘호를 펼치고 있다(2004년).
ⓒ 오마이뉴스 권우성
 
추격자 권중희에 관한 프로그램이지만, 본질은 도망자 안두희에 관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안두희에 관한 프로그램으로 한정할 수만도 없다. 과거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의 시선은 안두희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를 투과해 그 뒤의 배후를 탐색한다.

한국인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안두희가 단독범이냐 아바타냐'라고 보기는 어렵다. 권중희의 행동이나 진술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문제와 관련해 한국인들은 항상 이승만 정권과 미국에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안두희의 입에서 이승만과 미국이 언급되는지 아닌지에 관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락가락 진술

안두희는 단독 범행을 주장했다. 1955년 10월 20일 '아버지 전상서' 형식으로 작성한 <시역의 고민> 서문에서 1949년 백범 암살 사건을 거론하면서 "아버지! 5년 전 6월 26일 그날 두희가, 꿈 아닌 생시의 두희가 제 총을 가지고 제 손으로 김구 선생님을 쏘았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자기 배후에 거대한 세력이 있다는 의혹을 겨냥해 "일찍 아버님께서도 경모 숭배하시던 백범 선생을 아버지의 자식인 두희가 제정신으로 살해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제 총을 가지고', '제 손으로'에 이어 '제정신으로'라는 표현을 추가했다. 자기 의지와 계획으로 암살을 실행했음을 그렇게 강조했다.
  
 백범 서거 소식을 듣고 경교장으로 달려온 백성들이 통곡하고 있다. 안두희가 쏜 총알로 깨어진 경교장 2층 유리창이다.
ⓒ 백범기념관
 
서문에서 그는 단독 범행을 누차 강조했다. 종신형을 선고받고도 1951년 2월에 형집행정지를 받은 일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사회 일부의 방담자들은 '모 고위층 인물에 사주된 범의'이니 '모 군부의 지령에 의한 범행'이니 '불법의 석방'이니 하는 별의별 왜곡된 풍설을 유포시키고 있사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탄식했다.

그는 책을 펴낸 동기가 단독 범행임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무고한 제3자의 위신과 명예에까지 오명을 입히는 언어도단의 중상"을 그냥 묵인할 수 없어 "본의 아닌 출판을 결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아버님 전상서의 형식을 띠었지만, 실은 '국민 전상서' 형식을 빌려 단독 범행을 주장했다. '무고한' 미국과 이승만이 오명을 입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책을 냈던 것이다. 아버지 전상서 형식을 빌리면서까지 단독 범행을 주장했으면서도, 그는 대중 앞에 떳떳이 나서지 못하고 피해 다녔다. 그의 책은 그런 모습과 괴리된다.

안두희는 책을 펴내면서까지 단독 범행을 주장했지만, 정의봉을 쥔 권중희의 추격으로 인해 그의 진술은 크게 동요했다. 확고했던 진술은 '흔들리는 진술'로 바뀌었다.

추적 끝에 은신처를 찾아낸 권중희는 안두희 옆집으로 이사한 뒤 자연스레 접근했다. 19살 많은 안두희와 바둑 친구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가 침놓는 기술을 이용해 대침으로 엉덩이를 찌르고 몽둥이로 그를 후려쳤다. 그러면서 '배후를 대라'고 압박했다. 이것이 결국 안두희를 동요시켰다. 안두희의 입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듣고 보니 그럴싸> 11화 10여 년간 끈질기게 쫓았던 '안 영감'의 정체 예고편
ⓒ jtbc
 
1992년 4월 13일 자 <동아일보> 머리기사에 따르면, 이 신문 취재진과 권중희 일행이 함께한 자리에서 안두희는 "김창룡 특무대장(당시 육본 정보국 방첩대장)의 사주를 받아 범행했다"라고 진술했다.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의 정보기관장인 김창룡이 거사 후에 "안 의사 수고했소"라는 칭찬까지 해주었다고 증언했다.

안두희는 미국과의 관련성도 언급했다. 정보기관인 OSS(전략사무국)에 소속된 미군 중령이 "김구는 국론 통일을 방해하는 암적 존재"라는 말을 했으며 자신은 이를 '백범을 살해해야 한다"는 강한 암시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안두희가 미군 정보장교를 만난 시점은 OSS가 중앙정보국(CIA)으로 개편(1945.10.1)된 이후였다. 그렇기 때문에 OSS 장교를 만났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이를 근거로 안두희의 '미국 배후설' 언급이 거짓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OSS가 CIA로 개편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 때문에 암살 당시의 안두희는 습관적으로 OSS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혹은 일부러 명칭을 틀리게 발음해 미국 배후설 폭로의 파장을 줄이려 했을 수도 있다. CIA를 OSS로 말한 부분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증언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을 언급한 부분이 강압에 의한 것이라며 그는 진술을 뒤집었다. 이런 일이 계속 되풀이됐다. 그래서 암살 배후에 관한 안두희의 진술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종전의 단독 범행 주장이 흔들렸고 미국과 이승만이 거론됐다는 점은 의미 있는 변화다.

특히 이승만과 관련해서는 꽤 구체적인 진술이 나왔다. 1992년 9월 24일 자 <동아일보> 1면 좌단은 안두희가 이 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백범 암살 6일 전인 지난 49년 6월 20일 경무대 대통령 집무실로 불려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얘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잘하라'는 격려를 받았다"라고 밝힌 사실을 보도했다.

김구는 제2의 독립운동인 남북분단과 한반도 냉전을 반대하다가 경교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제주 4·3항쟁(4·3사건)에서도 나타났듯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분단과 냉전질서를 반대하는 세력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암살 배후일 거라는 심증을 갖게 됐지만,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권중희 같은 인물이 출현해 한국인들의 의문과 분노를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안두희에게 무서운 존재
 
 권중희 선생으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받고 누워있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와 가해자 권중희.
ⓒ 권중희 제공
 

그런데 안두희를 정말로 두렵게 하는 존재는 권중희만이 아니었다. 안두희가 신변의 위기를 겪은 시점들을 종합해 보면 그 존재의 실체가 드러난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석 달 뒤 15년형으로 감형된 안두희는 뒤이어 잔형을 면제받고 장교로 복귀했다. 그런 다음 전역해서 떼돈을 벌였다. 강원도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해 도내에서 손꼽히는 거액 납세자가 됐다. 군부대를 상대로 거부를 축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승만 정권의 비호가 명확해진다.

그렇게 강력한 비호를 받던 그가 위험해진 것은 1960년부터다. 4·19혁명이 벌어진 이해에 안두희를 체포하자는 여론이 일어났고,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했다(A). 그런 속에서 이듬해 4월 17일 '백범 김구 선생 살해진상투쟁위원회'의 김용희 간사가 안두희를 체포해 서울지검 차장검사실로 끌고 갔다(B).

1965년에는 백범독서회장 곽태영이 칼을 들고 안두희의 목을 찔렀다(C). 1987년에는 바둑 친구 권중희가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D). 권중희의 응징은 1991년(E)과 1993년(F)에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에 버스 운전사 박기서가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안두희의 목숨을 끊었다(G).

A와 B는 4·19 혁명으로 한국 민중의 역량이 크게 고양된 시기에 발생했다. C는 한일협정 강행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박 정권의 폭력성이 고조되는 동시에, 이에 맞서 한국 민중의 저항도 함께 고조된 시기에 일어났다.

D는 1986년 필리핀 피플 파워와 1987년 한국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한국 민중의 에너지가 재차 고조되고 미국과 한국 정권이 일시적으로 위축된 시기에 발생했다. E·F·G는 탈냉전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국가권력이 위축되고 민중의 역량이 강해지던 시기에 발생했다.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1991년 8월 14일에 증언한 일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된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1990년 전후에 시작된 탈냉전 시기에는 국가폭력이나 국가범죄를 해결하기 위한 민중의 노력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나타났다. 이런 시기에 권중희가 국민적 응원을 배경으로 안두희를 응징했던 것이다.

한국 민중이 강해질 때마다 '안 의사'의 신변이 위험해졌다. 이는 한국 국민의 전폭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김구 암살의 배후를 제대로 규명하기 어려운 현실과 연관돼 있다. 분단과 냉전을 반대한 김구가 암살당한 일은 한반도 정세의 근본 구조와 맞닿는다. 이런 일의 진상을 밝히려면 국민적 지원이 절실하다는 점을 안두희의 신변 문제는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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