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지로에서 힙무로로...‘충무로 전성시대’
날개 단 상권, 힙지로·명동 안 부럽다
낡은 인쇄 골목 이미지가 강했던 충무로 상권이 최근 ‘힙무로’로 거듭난 모습이다. 과거 명동과 동대문 사이에 위치한 ‘낀 상권’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요즘은 다르다. 인접 상권인 을지로가 ‘힙지로’로 탈바꿈하며 젊은 세대 유입이 늘었고 명동을 찾는 외국인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골목 곳곳에는 젊고 특색 있는 ‘핫플’이 빠르게 늘어나며 활기가 감도는 중이다.
영화 업계가 떠난 빈자리를 ‘힙스러움’으로 다시 채우고 있는 충무로 상권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을지로 상권과 인접한 북쪽으로 갈수록 유동인구가 더욱 많아진다. 베트남 쌀국수·독일 맥주·일본 이자카야 등 현지 인테리어를 고스란히 살린 해외 음식 전문점, 그리고 수십 년째 충무로 상권을 지켜온 노포들이 한데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날 만난 30대 직장인 김지희 씨는 “즐겨 보는 맛집 유튜브 채널에 충무로 노포가 자주 나와 궁금해서 방문해봤다”며 “오래된 가게만 있을 줄 알았는데 주변에 새로 생긴 듯한 세련된 와인바랑 술집도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충무로가 ‘확’ 달라졌다. 망해가는 극장, 노후된 인쇄 골목 등으로 대표되는 ‘한물간 상권’ 이미지는 온데간데없다. 낡은 건물과 뒷골목에 사이사이로 ‘신상 핫플’이 한가득 들어차고 있다. 과거 우중충한 골목에서 서울에서 가장 핫한 ‘힙지로’로 변모한 을지로3가 상권 전례를 그대로 따라가는 중이다.
오히려 지금은 충무로가 을지로3가를 넘어섰다. 소상공인진흥공단이 공식 지정한 상권 권역 기준으로 비교하면, 충무로 내 카드 결제액이 지난해 을지로3가를 역전, 올해에는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을지로3가 상권 내 위치한 점포가 2년 전 대비 7개 줄어드는 동안, 충무로는 70개 늘어났다. 누구보다 트렌드에 발 빠른 대형 인플루언서도 너 나 할 것 없이 충무로에 위치한 노포와 신규 음식점 소개에 나서는 중이다. 과거 맹위를 떨쳤던 ‘힙지로’에서 이제 ‘힙무로’로, 상권 권력이 이동하는 모습이다.
2년 동안 새 가게만 70곳 넘게 늘어
과거 충무로 상권은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명동과 동대문 사이에 끼어버린 입지 탓에 상권 형성이 활성화되지 못했다. 낡은 인쇄 골목을 주변으로 자리 잡은 음식점과 인현시장, 그리고 한옥마을 관광객과 동국대 학생들을 겨냥한 먹거리 골목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달라졌다. 충무로 상권이 주목받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을지로의 부상’이다. 2015년 이후 을지로 인쇄 골목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과 레트로 콘셉트가 큰 인기를 얻으며 젊은 세대가 찾는 힙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힙지로 시대가 본격화한 지 5~6년이 지나면서, 상권이 남쪽인 충무로 방향으로 점점 확장됐다. 을지로 상권 임대료가 오르고 매물이 줄어들면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충무로 쪽으로 자영업자가 방향을 틀기 시작한 것이다.
재개발 이슈도 있다. 을지로2가와 3가, 4가 구역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해당 지역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자영업자가 충무로로 적을 옮겼다. 예를 들어 을지로에서 한국식 인테리어와 콘셉트로 인기몰이를 했던 위스키바 ‘숙희’는 지난해 5월 충무로역 1번 출구 쪽으로 이전해 영업을 재개했다.
최근 한국을 향한 외국인 개인 관광이 늘어나면서 ‘명동’이 부활한 것도 충무로 상권에 호재다. 코로나 팬데믹 직격탄을 맞았던 명동은 최근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서울 144개 주요 상권 중 올해 상반기 기준, 전년보다 매출이 가장 많이 늘어난 곳 1위가 명동이다. 외국인을 비롯해 국내 소비자 발길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명동과 인접한 충무로 상권도 낙수효과를 보는 모습이다.
실제 최근 2~3년 새 충무로에 새로 입점한 가게가 많다. 빅데이터 전문기업 나이스지니데이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충무로에 자리 잡은 가게는 837개로 2022년(761개) 대비 70개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한국 최대 상권인 강남역 인근 음식점이 불과 6개 늘어났다는 점에 비춰보면 최근 충무로를 향한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다.
충무로 상권의 좋은 분위기는 카드 결제 데이터에서도 확인된다. 올해 상반기 기준 충무로 상권 카드 매출은 1620억원으로 2022년(1246억원) 대비 374억원 늘었다. 같은 기간 을지로3가 상권 매출(1549억원)보다 크다. 서울 내에서 전년 대비 카드 결제액이 늘어난 상권이 절반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무로 상권은 분명 우상향 중이다.
음식 업종 매출이 호조를 보인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2022년 674억원에서 올해 959억원까지 늘었다. 주시태 나이스지니데이타 실장은 “충무로 음식 업종 성장률은 서울 여타 상권과 비교해도 최고 수준”이라며 “음식 업종 매출은 유흥 등 2차 매출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해당 상권 활성화 척도로 꼽힌다. 충무로 상권 분위기가 좋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충무로 소개한 나영석…조회 수 200만
충무로 상권은 크게 2가지 권역으로 구분 가능하다. 중구를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퇴계로를 따라 퇴계로 이북(퇴북)과 퇴계로 이남(퇴남) 상권으로 나뉜다. 퇴북에는 을지로·명동과 인접한 ‘범을
지로 상권’, 그리고 진양상가와 인현시장을 필두로 한 ‘인현시장 상권’이 위치한다. 퇴남은 동국대 상권과 남산골한옥마을을 아우르는 ‘필동 상권’이 있다.
최근 가장 ‘핫’한 지역은 역시 ‘범을지로 상권’이다. 가게 이름에 을지로·명동이 붙은 경우가 많지만 따지고 보면 충무로 상권 내에 위치한 매장이 많다. 을지로·명동 임대료 상승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비싼 월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원주민이 인접 상권으로 내몰리는 현상)으로, 인접한 충무로 내 창업이 활발하다.
을지로에 위치한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을지로는 임대료도 높은 데다 들어갈 만한 곳에 가게가 전부 입점해 있어 매물 자체가 많지 않다. 충무로는 상대적으로 최근 손바뀜이 많은 상권”이라고 설명했다.
대형 상권에서 활약하다 충무로에 분점을 연 인기 브랜드도 많다. 강남·가로수길·도산공원 등지에서 영업 중인 오므라이스 전문점 ‘을지다락’, 성수동 일식 맛집으로 유명세를 타던 ‘진작’, 웰빙 멕시코 음식이라는 독특한 콘셉트를 지닌 ‘갓잇’ 등이 충무로 상권에 분점을 냈다.
외국 현지 느낌을 살린 로컬풍 가게 창업도 이어진다. 베트남 현지 인테리어를 고스란히 가져다놓은 듯한 ‘호앙비엣’, 대만 노포를 연상시키는 ‘바오서울’, 네온사인 등을 활용해 미국 음식점 느낌을 물씬 풍기는 ‘82올리언즈’와 ‘올디스핫도그’, 야외 바 테이블에서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를 파는 ‘구텐독’ 등이 대표적이다.
장준 호앙비엣 대표는 “노후된 건물 외관과 내부 옹벽 모습이 베트남 현지 무드를 잘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충무로 상권을 선택했다. 올해 3월에 문을 열었는데, 9월에는 월매출 6000만원을 돌파하는 등 분위기가 좋다”고 설명했다.
인현시장 상권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노래방 등 유흥가가 성업했지만 최근 들어 젊은 세대가 몰리면서 기존 노포와 새로운 가게가 신구 조화를 이뤄 활기가 돈다. 인현시장 내 위치한 병어조림 맛집 ‘진미네’, 백종원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물갈비 맛집으로 유명세를 탄 ‘호남식당’, 이모카세 맛집으로 인기가 많은 ‘통나무집’ 등 단골층이 두터운 노포가 많다. 여기에 태국 음식 전문점 ‘로스트템플’, 대화 없이 신청곡을 들을 수 있는 예약제 혼술바 ‘인현골방’, 벽지 대신 신문지로 멋을 낸 푸딩 전문 카페 ‘재해석’ 등 신흥 강자도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신구 조화’는 충무로 전체 상권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됐다. 젊은 세대뿐 아니라 50대 이상 중장년층도 충무로를 많이 찾는다. 노포가 워낙 많은 데다 연령대가 너무 어려진 을지로를 피해 충무로를 찾는 이들도 늘어난 모습이다. 나이스지니데이타가 충무로 상권 내 연령·성별 결제 비중을 분석한 결과, 50대 남성 비중(17.2%)이 가장 많았다. 뒤를 이어 40대 남성(16.6%), 30대 남성(14.2%) 순으로 많았고 60대 이상 남성도 10.7%나 됐다. 반면 을지로3가는 30대 남성(18.4%)이 주 소비자층이다. 50대 남성은 14%, 60대 이상 남성은 7.8%에 그친다.
필동 상권은 특히나 이름난 노포가 많다. 웨이팅 없이는 입장조차 어려운 ‘필동면옥’을 비롯해 나영석 PD와 배우 김대명이 방문하며 화제를 모은 ‘태화루’,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늘 손님으로 붐비는 막회 맛집 ‘영덕회식당’ 등이 대표적이다.
인현골방 관계자는 “충무로는 MZ세대 못지않게 직장인도 많은 지역이다. 퇴근 후 힘들었던 하루를 마감하거나,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하는 다양한 연령층이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명동 방문객 계속 유입되고
오피스 개발도 한창…직장인 수요↑
충무로 상권은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핫’한 상권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경쟁력 있는 가게는 살아남고 공실에는 신규 가게가 계속 입점하고 있어 생동감이 넘친다. 인접한 을지로와 명동 상권 강세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도 호재다.
애초에 배후인구가 풍부한 지역이기도 하다. CJ제일제당, CJ인재원, 대우건설, 샘표 등 충무로에 위치한 대기업이 많아 직장인 수요가 크다. 인근 직장인을 비롯해 동국대 학생도 즐겨 찾는 지역이다. 남산골한옥마을을 찾는 방문객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오피스 개발도 활발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문을 닫았던 서울 중구 티마크 호텔 명동은 이지스자산운용이 매입한 후 최근 오피스 전환 리모델링 공사를 성공리에 마쳤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올해 8월 남산스퀘어 환경개선 공사를 마무리하는 등 충무로에 특히나 관심이 큰 운용사다. 서울 중구 충무로2가에 들어서기로 예정된 ‘충무로 남산N타워’ 등 대형 오피스 개발이 여전히 한창이다.
충무로 음식점 알돈익스프레스 관계자는 “직장인 유무, 외국인 관광객 여부, 주말 상권 활성화 정도 등을 고려해 충무로에 매장을 열게 됐다”며 “명동 방문 관광객과 을지로 젊은 소비자 덕에 많은 청년 자영업자들이 눈여겨보는 상권으로 거듭났다”고 설명했다.
[나건웅 기자 na.kunwoo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0호 (2024.10.16~2024.10.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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