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비행기 훔쳐서 탈출... 이런 한국 청년 있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일제강점기 한국 청년의 탈출 장면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이다. 일본 유학 중에 강제징병된 만 26세의 장준하는 1944년 7월 7일 상하이를 낀 장쑤성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했다. 그런 뒤 6000리를 걸어 이동한 끝에, 이듬해 1월 중국 남서부 충칭에서 백범 김구를 만났다.
이 장정은 장쑤성 쉬저우의 일본군 부대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6000리를 쭉쭉 걸어간 것은 아니다. 같은 지역을 뱅뱅 돌며 제자리걸음을 해서 시간이 지연될 때도 있었다.
탈출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연 사흘을 걸어, 죽을 힘을 다해서 헤어 나온 것이 겨우 15리 길이라니" 하고 탄식하는 일이 있었다. "우리가 탈출한 쉬저우의 그 쓰카다 부대가 불과 15리 밖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몸서리치게 했다"라며 "아무리 따져보아도 150~160리는 걸었을 터인데, 불과 15리 길을 150리나 걸어서 왔다니 기가 차서 아무런 용기가 나지 않았다"라고 장준하는 항일수기 <돌베개>에서 회고했다.
이 탈출과 비슷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장준하 못지않은 용기로 일본의 손아귀를 빠져나온 22세 청년이 있었다. 1918년생인 장준하보다 9년 일찍 태어난 이 청년의 탈출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에 있었다.
원적은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이고 이름은 임도현인 그는 장준하처럼 15리 길을 사흘간 뱅뱅 돌 필요가 없었다. 그의 탈출 방식은 장준하와 완전히 판이했다. 1936년 5월 4일 자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판결문에서 그의 이동 수단을 확인할 수 있다.
상하이로 '도항'한 항일 비행사
▲ 본문에 인용된 일제강점기 판결문. |
ⓒ 임정범 제공 |
▲ 본문에 언급된 일제강점기 판결문. |
ⓒ 임정범 제공 |
징역 10월을 선고하는 이 판결문은 임도현이 다치카와비행학교 재학 중인 소화 6년(1931년) "비행술 수업 중에" 대열을 이탈해 "상하이로 도항(渡航)"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영사관에 의해 고향으로 송환된 것은 소화 9년(1934년) 12월이라고 판결문은 말한다.
'도항'은 선박을 사용한 이동을 표현할 때가 많지만, "비행술 수업 중에" 도항했다고 했으니 항공기를 사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비행 수업 도중에 비행기에 내려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갔다면, 굳이 "비행술 수업 중에" 도항했다고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임도현을 체포하기 전에도 그를 계속 감시했다. 강제송환 이전인 1934년 5월 1일에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부가 기록하고 일본 외무성의 <간도 및 조선·만주 접경지방 치안정황 보고 종합(間島及滿鮮接壤地方 治安情況報告雜簒)> 제14권에 수록된 공문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는 이 시점의 임도현이 "항주비행학교에 입학하려는 의심"이 든다고 보고했다. 임도현이 중국군에 가세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던 것이다.
▲ <류저우 20세기 도록> 속의 임도현. |
ⓒ 임정범 제공 |
임도현이 국가보훈부가 공인한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중국 체류 기간에 항일투쟁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흔적이 있다. 1941년에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한 '이력서'에서 그는 1934년에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왼쪽 눈썹 위쪽에 총알을 맞았다고 회고했다.
▲ 본문에 인용된 소견서. |
ⓒ 임정범 제공 |
임도현은 1941년에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제주도로 강제송환됐다. 이 정도로 감시가 심했는데도 그는 제주 지역의 항일투쟁에도 가담했다.
▲ <조천읍지>에 적힌 임도현. |
ⓒ 임정범 제공. |
그의 독립운동은 왜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나
임도현은 머리 총상 외에도 일경의 고문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못했다. 후유증을 견디다 못한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 4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일럿의 꿈을 안고 일본 비행학교에 입학했지만, 만주사변이 나던 해에 비행기를 끌고 중국에 가면서부터 임도현의 인생은 격랑에 휩싸였다. 머리에 총상을 입는 일도 있었고, 그와 중국의 관계를 의심하는 일본에 의해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조카 임정범씨는 임도현의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해 25년째 고군분투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직접 자료를 수집하고, 국가보훈부와 대통령실을 상대로 국가유공자 지정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임정범씨가 정리한 파일인 '임도현 항일비행사의 독립운동자료들'은 A4 용지 68장으로 되어 있다.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을 자료들을 수집했던 것이다.
▲ 국가보훈부를 상대로 1인 시위하는 임정범씨. |
ⓒ 임정범 제공 |
역사학에 대한 훈련이 되지 않은 독립유공자 유족에게 '조상의 독립운동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도 임정범씨는 직접 외국의 공공기관을 돌며 자료를 수집했을 뿐 아니라, 쉽게 생각하기 힘든 유골 검사까지 단행했다. 유족이 이 정도 했으면 입증책임(독립유공자가 맞다, 아니다)의 나머지 부분은 국가가 부담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임도현이 비행기를 몰고 일본을 탈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선뜻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점은 재판 기록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일본 비행기를 훔쳐 중국으로 망명할 정도의 역량이 한국 청년들에게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임도현의 항일투쟁을 못 미더워 하는듯한 국가보훈부의 태도는 아직도 대단한 항일투사들이 인정받지 못한 채 묻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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