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화 계급도,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유진 기자]
무언가를 시작할 때, 온갖 장비를 다 챙겨서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코웃음 치곤 했다. 해발 200미터의 뒷동산을 올라가는데 등산 전문 브랜드로 치장한 등산객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그랬다. (중략) 풀 세트로 장착하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런 내가 얼마 전, 러닝화를 샀다. 무려 20만 원짜리 러닝화를.
달리기의 가장 큰 장점은 딱히 필요한 게 없다는 것이다. 달리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도 한동안은 그 의지로 달렸다. 하지만 뛰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부상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발목을 잘 잡아주지 못하는 신발을 탓했다.
(중략) 드디어 새 신을 신고 뛰던 그날, 나는 '와, 진짜 다르긴 다르구나.'를 육성으로 내뱉으며 달렸다. 그전엔 지면과 발이 직접 닿는 느낌이었는데, 이 신발은 그렇지 않았다. (중략) 발목과 발등의 부상도 이후로 생기지 않았다. 뛰면 뛸수록 그간 무시했던 장비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 강주원, <보통의 달리기> 56-58쪽
나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달리기는 두 다리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신발장에 굴러다니던 낡은 운동화를 신고 달리다 3주 만에 무릎 부상을 입었다.
가성비 (그러니까 안 비싼데 좋은!) 러닝화를 찾고 찾았는데, 추천된 러닝화들이 15만~20만 원 사이. 내 평생 그렇게 비싼 신발을 산 적이 없었다. 안 살 수도 없고, 아무거나 샀다가 또 다치면 안 되겠고... 그래, 학원을 다녀도 한 달에 그 정도는 드니까... 최소한의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지갑을 열었다.
그랬던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고 반년 만에 러닝화 네 켤레를 샀다. 에... 그러니까, 사정은 이러하다.
▲ 벌써 반년이라니, 500km 가까이 달렸다니. (러닝화 하나 더 사긴 샀어야 했네!) |
ⓒ 정유진 |
그런 와중에 추천목록에서 늘 빠지지 않으나 내 기준 비싼 축에 속해서 단념한 러닝화가 반값 할인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시 말하지만 쿠션이 중요한 러닝화는 수명이 있는데 대략 500킬로미터를 달렸으면 바꿔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쯤 평생 달리기로 결심한 나로서는 그 운동화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모셔두기로 하고...
1번과 2번 운동화를 번갈아 신으며(장단점이 확실히 달랐다) 달리기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평생 달리기를 하겠다는 마음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달리기를 '일상의 운동'으로서 꾸준히 할 수도 있지만, 어쩐 일인지 도전하고 성장하고픈 욕구가 자꾸 샘솟는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오래, 온갖 곳을 달리고 싶은 것이다.
그 길은 풀코스 마라톤(더 나아가 울트라마라톤) 아니면 트레일 러닝인데, 풀코스 마라톤은 이대로 조금씩 훈련을 해나가면 되고... 트레일 러닝을 하려면 일단 트레일 러닝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침 추천 운동화가 또 할인을...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달리기를 안 했다면 나 역시 이런 구매 행위자를 보고 조용히 혀를 찼을 것도 같다. 물론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다 나처럼 러닝화를 '사대는' 건 아니겠지만(나랑 똑같이 달리기를 시작한 남편은 한 켤레만 샀다), 지금 나는 러닝화를 사겠다고 돈과 시간을 쓰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다치지 않고 계속 잘 달려보려고 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한 번 말하지만, 나에게 맞는 좋은 러닝화가 필수불가결하다.
달리기의 세계에서 중요한 건 '달리기'
그런데 이런 기사가 나왔다. '러닝 붐에 '러닝화 계급도' 유행... 급 나누기 문화 어디까지?', 러닝화마저 계급이 나뉘어 있고, 이는 모든 것에 등급을 매기는 우리나라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 '급' 나누기가 아니라, 러너의 목표와 수준에 따른 구분 아닐까. '계급'이란 말은 위트고. 내겐 이 표가 일종의 정보로 보인다. 아래 가격대가 텅 비어 매우 아쉽긴 하지만. |
ⓒ 온라인 커뮤니티 화면 캡처 |
비싼 운동화 신었다고 우대하거나 싼 운동화 신었다고 소외시키는 러닝 문화가 있을까? 아, '초보자 카본화 착용 금지' 유머는 있다. '못 달리니까 비싼 운동화 신을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라, '부상 방지를 위해 신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급 높은' 러닝화 신은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고, '급 낮은' 러닝화 신었다고 무시하는 러너가 있을까? 그러니까 달리기의 세계에서 '달리기'가 아니라 '러닝화'로말하려는 사람이?
반년 차 러너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러너라면, 달리기를 즐길 줄 알거나, 기록이 좋거나, 꾸준히 달리거나, 실력에서 확연한 변화를 보이거나, 도전을 멈추지 않거나, 핸디캡이 있음에도 달리거나, 달리기로 좋은 일을 하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선망을 품고 스스로도 그렇게 성장하려 한다고. 러닝화는 잘 달리기 위해 신을 뿐.
20,30대가 달리기를 많이 하면서, 착장에 더 신경 쓸 수는 있겠다. 운동화뿐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예쁘게, 더 멋지게, 더 힙하게 입고 신고 쓰고 차는 것이다(이런 건 눈에 잘 띈다). 그런데 그건 당연하지 않나? 사춘기 학생들이 친구 따라 스타일이 비슷해지고, 엄마들이 자신보다 아이를 치장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처럼. 보통의, 본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들도, 저 '계급도'만 보고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 특정 러닝화를 덜컥 사지는 않을 것 같다. 설사 처음 한 번 그랬을지라도, 계속 달리기를 한다면 다음엔 참고해서 자신에게 맞는 운동화를 찾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달리기를 이어갈 수 없을 테니까.
마음을 주게 되면 쓸 수밖에
ㅡ저도 한강에서 가끔 달려보는데, 요즘 느끼는 게, 예전에 골프 때처럼 요즘 달리기도 험블한 운동이 아니고, 패션이 장난이 아니야. 완전... 풀... 풀로 갖춰놓고...
ㅡ색깔도 깔 맞춤이 돼야 되고, 양말까지...
ㅡ브랜드도 통일시키죠.
ㅡ장비가 비싼 건지 처음엔 몰랐다가 저도 배웠을 거 아니겠어요. 러닝화도 비싸더만요.
ㅡ러닝화도 비싼 건 정말 비싸요.
ㅡ달리려면 팬티도 사야 되고, 벨트도 사야 되고, 반바지 따로 사, 신발 사야지, 머리띠 사야 되고. 양말도 새로 샀어. 안경도...
ㅡ저는 안경까진 아직 안 갔는데, 도구가 뭐가 있냐면, 가민워치를 하나 사줘야 돼. 그리고 샥즈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이어폰이 있어요.
ㅡ아, 골전도! 그것도 엄청 쓰더만... 가민워치에다가 저거 두 개면, 벌써 근 50 썼네.
ㅡ50 더 쓰죠.
ㅡ잘 뛰시는 분들? 다 갖추는 거예요?
ㅡ아, 그게 왜 그러냐면, 양말만 바꿔도 느낌이 달라요. 진짜로. 양말이 뭐라고... (양말 설명 한참) 접지력이 달라요.
ㅡㅋㅋㅋㅋㅋ
ㅡ지금 비웃은 거예요? 코로 웃은 거 같은데?
ㅡ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할 수가 없잖아.
ㅡ이 동네 세계에 그런 게 있다고요~
ㅡ이게 왜 그러냐면, 왜냐. 너무 힘들잖아. 진짜 너무 힘드니까, 그 미세한 차이에 위안을 받는 거야.
ㅡ진짜 그게 있어.
ㅡ애초에 안 달리면 되는 거잖아.
ㅡ건널 수 없는 선이 그어져 있구나. 달리는 세 명과 안 달리는 두 명과.
/팟캐스트 <손에 잡히는 경제>, "러닝이 언제부터 이렇게 비싼 취미가 됐나요" 중에서.
이 대화를 들으면서 나도 좀 웃었다. 그러니까 러닝화뿐 아니라 구매해야 할 것들은 온몸으로 확장되는데, 이에 대해 '달리는 사람'과 '달리지 않는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선'이 정말 있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 원래 마음을 주면 돈, 시간, 에너지 등 내 것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게 되니까.
물론 달리는 사람이라 해도, 사람마다 가치관과 소비습관 그리고 경제적 상황과 여건 등이 다르다. 그에 따라 실제 구매 양상은 다를 것이다. 그래도 각자 왜 그러는지 그 마음은 서로 알아줄 것 같다. 어느 부분에서 만족하거나 실망하고, 또 어느 시점에 시행착오를 겪고 교훈을 얻거나 무감해지는지 역시 다를 테지만.
▲ '가족런' 신청에 절대 반대했던 둘째가 제일 열심. 달려보니 재밌지? |
ⓒ 정유진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32년 전 신해철의 말, '넥스트' 앨범 든 이태원 유족은 울먹였다
- [단독] '코바나 후원' 희림건축, 윤 정부 출범 후 국방부 계약액 2배 증가
- 허은아 "김 여사 연락 받은 게 문제? 최근 통화 안 해"
- 신용한 "대선 날 '명태균 보고서' 회의, 친윤계 쫄리니 메신저 공격"
- "무인도 잡아라", 야밤에 가건물 세운 외지인 수백명
- 트럼프일까, 해리스일까…삼성-현대차 등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
- 죽창가가 느닷없이 나왔을 때 싫은 마음이 들었던 이유
- "이태원참사 2년, 진실 향한 걸음 멈추지 않아"
- "문재인 검찰 의미 없다"며 답변 거부한 유동규
- 정권 바뀔 때마다 추락 반복... KBS는 포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