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환자 오지 마, 의사가 간다"…제주한라병원의 '발칙한 반란'[下]'
인구 70만 상대 제주병원 vs 5천만 전국민상대 수도권병원
'하드웨어 경쟁'은 필패의 길…제주 의료만의 대책 있어야
"외상 사망률 34%→2.11%"…한라병원이 증명한 '시스템의 기적’
"비행기 못 타는 환자부터"…서울 명의 왕진, 이비인후과가 최적 모델 제주
편집자주 본지는 지난 19일 ‘암 환자 기자가 본 제주 상급병원의 '불편한 청구서(아시아경제2026.1.19)'보도를 통해, 준비 없는 상급종합병원 지정이 도민들에게 비용 부담만 안길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보도 직후, 당사자인 제주한라병원 측은 "기사에서 지적한 현장의 문제인식이 병원 측 생각과 98% 일치한다"며 제주에 실질적인 의료 대책을 설명 했다. 김성수 제주한라의료원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간판을 바꿔 진료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명의(名醫)를 제주로 모셔와 환자의 비용을 낮추는 것이 나의 해법"이라며 그동안 준비한 파격적인 '대안'을 공개했다. 이번 기사는 비판을 넘어 실질적인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마주 앉은 언론과 의료 현장의 치열한 고민을 정리하고, 나아가 제주 의료가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주 의료가 서울을 따라잡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실력' 이전에 '시장(Market)'의 한계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인구 5천만 명을 배후에 둔 서울 '빅5' 병원의 규모를, 인구 70만 명이 채 안 되는 섬에서 독자적으로 구축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기본 설정'부터 잘못된 게임이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무리하게 덩치만 키우다 보면, 그 적자는 고스란히 도민들의 '진료비 인상'으로 메워질 수밖에 없다.

■ "사망률 30%대 → 2%의 기적"… 데이터가 증명한 '선택과 집중'
그렇다면 답은 어디에 있을까. 김성수 한라병원장은 '권역외상센터'의 성공 사례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국내에 권역외상센터가 도입되기 전인 2011년, 한국의 예방 가능 외상 사망률은 34%에 달했다. 살릴 수 있는 환자 10명 중 3명을 놓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문적인 시스템이 갖춰진 현재, 한라병원 권역외상센터의 사망률은 2.11%(2023년 기준)까지 떨어졌다.
이는 전국 평균(9.1%)은 물론, 미국 최상급 외상센터(Level 1)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수치다. 대학병원도 기피하는 분야에서 민간 병원이 '시스템'과 '집중'만으로 선진국 수준의 성과를 낸 것이다.
■ "이국종도 '손해'라던 외상센터…민간병원의 '선순환' 경영"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라병원의 '태생'이다. 이곳은 정부의 세금으로 운영 손실을 메워주는 국공립병원이 아니다. 엄연한 '민간(비영리 의료법인)' 병원이다. 전국 17개 권역외상센터 중 의과대학이 없는 순수 민간 종합병원이 지정된 곳은 한라병원을 포함해 단 3곳(목포 한국, 안동)뿐이다.
'아덴만의 영웅' 이국종 교수가 수차례 토로했듯, 외상센터는 구조적으로 "환자를 살릴수록 병원은 적자를 보는" 시스템이다. 그럼에도 한라병원이 이를 유지하는 비결은 '경영의 선순환' 전략에 있다.
특화 센터(척추·관절 등)와 의료관광(WE호텔) 등에서 경영 효율화를 통해 창출한 수익을, 당장 돈은 안 되지만 생명을 살리는 데 필수적인 외상센터와 희귀암 분야에 재투자하는 방식이다.
"안정적인 곳에서 기반을 다지고, 그 힘으로 사각지대의 생명을 지킨다"는 민간 병원 특유의 생존법이자 공익적 전략인 셈이다.

■ "비행기 못 타는 환자부터"… '환자 이동' vs '의사 왕진'
이제 제주 의료는 '건물 짓기' 경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발상을 전환하면 더 효율적인 길이 보인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환자를 찾아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암 환자 100명이 서울로 가기 위해 쓰는 항공료, 체류비, 그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길바닥에 뿌리는 고단한 시간이라는 사회적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반면, 서울의 명의(名醫) 한 명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내려와 100명을 진료할 때 드는 비용은 그 1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무엇이 더 합리적이고, 무엇이 도민을 위한 '고품질 의료'인지는 자명하다.
특히 김 이사장이 첫 타깃으로 이비인후과(두경부암)를 선택한 것은 고도의 전략이자 과학적 판단이다. 두경부암 환자들은 수술 후 기압 변화나 호흡 곤란 위험 때문에 비행기 탑승 자체가 금기시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서울 가서 수술받으라"는 말은 "목숨 걸고 이동하라"는 말과 같다. 이를 위해 병원은 서울 명의가 제주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과감한 시설 및 장비 투자를 선행해야 한다.
■ "서울 못 가서 죽었다"는 원한(恨)… 돈 아닌 '생명의 존엄' 지키는 길지방에 사는 암 환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하나는 암이라는 병마(病魔)고, 또 하나는 "내가 서울에 살았다면 살 수 있었을까"라는 자괴감이다.
제주 환자들이 기를 쓰고 서울로 향하는 기저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다. 반대로 돈이 없어서, 혹은 거동이 불편해서 서울로 가지 못하는 환자들은 "서울 못 가서 죽는다"는 씻을 수 없는 원한(恨)을 안고 눈을 감는다.
한라병원이 시도하는 '서울 명의의 왕진'은 단순히 항공료 몇 푼을 아껴주는 경제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생명에 대한 선택권을 박탈당했던 환자들에게 '나도 내 집 앞에서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존엄을 돌려주는 일이다.
소비자인 환자가 내 생명을 맡길 의사를 내 집 앞으로 부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환자 주권이자, 지방 의료가 나아가야 할 인본주의적 미래다. 정부 역시 수천억짜리 '상급병원 간판'을 달아주는 보여주기식 행정 대신, 이 '생명의 길'을 닦는 데 예산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호남취재본부 박창원 기자 capta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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