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셰프', 여자는 '이모님'...'흑백요리사' 이건 아쉽다
[이진민 기자]
▲ 1화, 6화 화면 갈무리 |
ⓒ NETFLIX |
확연한 성비 차이는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에서도 드러난다. 이 프로그램은 요리 계급 전쟁을 콘셉트로 삼아 재야의 고수 '흑수저'와 스타 셰프 '백수저'의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이 치열한 싸움에서 가장 밀린 계급은 흑수저도, 백수저도 아닌 여성이었다.
흑수저 80인 중 14명, 백수저 20인 중 4명. 총 18명의 참가자만이 여성 셰프였다. 절반을 넘기지 못한 건 애초에 성공한 여성 셰프가 드문, 씁쓸한 현실 고증일지 모른다.
아쉬운 건 그들을 대하는 프로그램과 다른 참가자들의 태도다.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셰프가 '어머님'이 되고, 여성 셰프끼리 경쟁은 '캣파이트(여성 간 경쟁을 낮잡아 이르는 말)'가 되는 <흑백요리사>. 넋 놓고 음미하기엔 영 텁텁하다.
캐릭터 보여주기엔 턱없는 분량... 성차별 호칭 아쉬워
프로그램 특성상 100명의 요리사가 출연하는 만큼 한 명씩 진득하게 볼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고려해도 여성 출연진의 분량은 남성에 비해 부족하다. 1라운드 흑수저 결정전에선 '요리하는 돌아이', '트리플 스타', '철가방 요리사' 등 캐릭터성이 강렬한 남성 셰프들이 눈길을 끌었고 2라운드 1 vs. 1 흑백대전에서는 많은 여성 셰프들의 대결이 편집됐다.
2라운드는 동일한 재료를 두고 흑수저와 백수저가 맞대결하는 방식으로 셰프마다 특색있는 재료 활용 방식과 센스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세계 3대 요리 대회에서 2관왕을 거둔 조은주, 안주 음식의 정석 '이모카세 1호', 깐깐한 어린이의 입맛을 사로잡은 '급식대가' 등 여성 셰프들의 모습은 상당히 축약됐다. 단순 승패만 알려주었을 뿐, 그들이 어떠한 의도를 갖고 요리했는지 셰프가 설명하고 심사위원과 질의하는 장면은 생략됐다.
이어진 3, 4라운드는 팀 미션으로 리더 포지션에 비중이 쏠렸고 여성 헤드 셰프는 조은주가 유일했다. 정지선처럼 팀원임에도 크게 활약했던 여성 출연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만 송출돼 그 진가를 알아보기 어려웠다는 시청자 평이 많았다. "2라운드에서 '급식대가'가 요리한 비하인드를 보여달라", "여성 셰프들이 직접 요리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상위 라운드로 갈수록 여성 출연진의 숫자와 분량이 줄어들었다" 등의 반응이 눈에 띄었다.
그나마 여성 출연진의 존재감이 드러났던 순간은 정지선과 '중식 여신'의 2라운드 대결이었다. 프로그램에선 그들의 싸움을 '여왕'과 '여신'의 대결이라 칭하며 출연진의 요리 실력, 히스토리, 개성에 집중하기보단 같은 성별 간에 벌어진 싸움 구도로 연출했다. 이에 한 시청자는 "왜 여성 셰프들끼리 경쟁하는 모습을 '캣파이트'처럼 묘사했냐"고 토로했다.
아쉬운 건 연출만이 아니다. 다른 출연자들이 무의식중에 뱉은 호칭도 한몫했다. 1화에서 식당 <엄마밥상>을 운영하는 '천만 백만'을 심사위원은 "어머님", 어느 출연진은 "아줌마"라고 칭했다. 4화에선 한 출연진이 Olive <한식대첩> 우승자 이영숙 명인을 "어머님"이라 칭했고, 5화에선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두고 "어머님이 계시니까 국은 딱"이라 칭찬했다.
5화에선 한 출연진이 '이모카세 1호'를 "이모님"이라 칭했고, 6화에선 '이모카세 1호'와 '급식대가'가 재료 다듬는 과정을 두고 "이모님들 깔끔하시다"라고 반응하는 출연진 모습이 실렸다. 전문성을 살려 대결하는 자리임에도 여성을 향한 호칭은 직업인에 대한 올바른 예우 표현이 아닌 '어머님', '이모님', '아줌마' 등 성별을 부각한 단어가 따라붙었다. 같은 명장인데 남성 출연진은 "셰프님", 이영숙 명인은 "어머님"이 되는 현실. 악의가 없었더라도 성인지 감수성은 부족했던 지점이다.
▲ 정지선 셰프가 요리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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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마다 정지선은 호쾌하게 '능력' 웍질을 했다. 2라운드 맞대결에서는 "그냥 이기려고 나왔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3라운드 팀 미션에선 실패를 맛봤지만, "자극이 돼서 더 공부하겠다. 쉽게가 아니라 신중하게 도전하겠다"며 숨을 골랐다. 4라운드 팀 미션에선 팀원 중 낙오자를 골라야 하는 가운데 한 팀원이 멋쩍게 자원하자 "가만있어"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4라운드 레스트랑 미션에서 유일하게 잔반량을 조사한 셰프였다. 손님들이 남은 음식을 버린 '짬통'을 살펴보며 스스로 피드백했고 그 덕에 최다 판매 메뉴를 개발하게 됐다.
이어진 활약상은 '이모카세 1호'였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뇌출혈, 어머니의 투병으로 결국 앞치마를 맸던 요리 인생의 시작을 되돌아봤다. 어머니가 가난을 극복하고자 시작했던 국수 장사를 이어받은 자신을 회고하며 "기적 같은 국수"라고 고백했고, 시청자들은 진심 어린 공감을 보냈다.
왜 여자는 '요리'는 해도 '요리사'를 꿈꿀 수 없나
집에서 요리는 여전히 여성의 일로 인식되지만, 사회에선 남성만의 '전문직'이다. 불과 무거운 주방 도구를 다룰 수 있는 건 상대적으로 물리적 힘이 있는 남성이라는 사회적 시선, 그리고 여성을 소외하는 마초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 문화가 그 이유일 것이다.
여성 셰프 33명을 인터뷰한 책 <여성 셰프 분투기>에선 현장의 성차별과 미디어의 편견을 또 다른 원인으로 꼽았다.
저자는 2004~2009년 미국 매체에 실린 요리 기사 2206건 중 1727건에 남성 셰프가 등장하고 그들은 강한 리더십을 지닌 혁신적인 창조자로 묘사되는 반면, 여성 셰프는 과소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15년이 흐른 자료지만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스타 셰프'하면 떠오르는 인물, 유명 요리 프로그램의 출연진이나 셰프 이름을 내걸어 유명해진 제품을 떠올리면 그 안에 모두 남성이 있다.
<흑백요리사>는 2주 연속 넷플릭스 글로벌 TV(비영어)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새로운 예능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 화제성만큼 영향력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이 '여성 셰프'를 다루는 방식에는 재미 그 이상의 것이 달려있다.
▲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메인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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