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만 무지하게 재밌다"... 78년의 응어리 풀어낸 '내 이름은'

고창남 2026. 5. 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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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정지영과 '제주의 딸' 고두심이 만났다... 430인 릴레이 상영회 뜨거운 열기

[고창남 기자]

▲ 기념촬영 영화 <내 이름은> ‘릴레이 상영회’에 참석한 관객들이 정지영 감독(맨앞줄 왼쪽 첫 번째)과 고두심 배우(맨앞줄 가운데), 양윤호 감독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고창남
"영화는 아프더라도 재미있어야 합니다. '슬픈 역사라 보기 힘들다'는 편견을 깨주십시오. 밖에 나가셔서 '아프지만 무지하게 재미있다'고 꼭 전해주셔야 합니다."

지난 3일 오후,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 상영관. 이탈리아 우디네 극동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고 귀국한 정지영 감독이 관객들을 향해 간곡히 당부했다. 제주 4·3의 비극을 다룬 영화 <내 이름은>이 관객들의 뜨거운 입소문을 타고 '기억의 연대'를 넓혀가고 있다. 이날 현장은 서울제주도민회 회원 등 500여 명을 초청한 '릴레이 상영회'와 정지영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GV)로 채워졌으며, '제주의 얼굴' 고두심 배우와 양윤호 감독이 함께해 그 의미를 더했다.

시민 1만 명의 '만 원'이 만든 기적

영화 <내 이름은>의 출발은 특별했다. 2021년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공동 주최한 '4·3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완성까지 5년의 세월이 걸렸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작 방식이다. 1만 명의 시민이 적게는 1만 원부터 많게는 1000만 원까지 마음을 보태 제작비를 마련했다. 시민들의 소중한 자금이 영화 제작의 든든한 밑거름이 된 셈이다.

박선후 PD는 상영 전 인사에서 "시나리오 공모부터 개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완성된 작품"이라며 "제주만의 디테일을 살리면서도 과거의 비극을 현재의 시점으로 풀어내려 노력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해외 영화제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흥행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제주 출신 영화인들과 서울제주도민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릴레이 관람 운동'에 나섰다.
▲ 관객과의 대화 관객과의 대화(GV)에 나온 정지영 감독과 고두심 배우, 양윤호 감독(오른쪽부터)
ⓒ 고창남
고두심 "진부한 아픔 넘어선 예술적 승화"

이날 GV의 백미는 단연 배우 고두심의 등장이었다.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오직 고향 제주와 정지영 감독을 응원하기 위해 달려온 그는 관객석에서 영화를 본 뒤 울림 있는 목소리로 소감을 전했다.

"제 고향의 아픈 이야기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하지만 옛날처럼 진부하게 아픔만 강조했다면 관객들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정지영 감독님이 아픔을 예술로 승화해 맛깔스럽게 만들어주신 덕분에 작품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는 특히 주연을 맡은 염혜란 배우에 대해 "평소 팬이었는데, 정말 좋은 배우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또한 20년 전 4·3을 배경으로 한 연극 <느영나영 풀멍 살게>에 출연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는 4·3이라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하던 시절이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이 된 것만으로도 응어리가 풀리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발언하는 고두심 배우
ⓒ 고창남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다룬 연극 <느영나영 풀멍 살게(너랑 나랑 맺힌 한을 풀며 살자)>는 제주 출신 고두심이 주연을 맡았던 작품으로, 참혹한 역사 속 희생된 민초들의 아픔과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적인 사랑을 예술적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언하는 양윤호 감독
ⓒ 고창남
양윤호가 양보하고 정지영이 빚다

양윤호 감독과 정지영 감독의 끈끈한 선후배 의리도 화제를 모았다. 사실 양윤호 감독은 이 영화의 원작 시나리오 공모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다. 직접 연출하고 싶을 만큼 탐냈던 작품이었지만, 거장 정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게 되자 기꺼이 자리를 양보했다.

양 감독은 "원 시나리오의 90% 이상을 감독님이 직접 바꾸셨는데, 제가 본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훌륭해졌다"며 "제주 출신이 아닌 거장의 시선으로 4·3을 바라보니 부연 설명 없이도 역사의 맥락이 선명하게 다가왔다"고 극찬했다. 이에 정 감독은 "양보해 준 후배가 고마워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이 컸다"고 화답했다.

"아들들이 재밌대요"... 세대를 잇는 기억

객석의 반응은 뜨거웠다. 경기도 파주에서 온 한 관객은 "이 영화는 단순히 제주의 비극이 아니라 국가 폭력과 인간성 훼손에 관한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라며 "중·고등학생들이 반드시 봐야 할 미래의 지침서"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현장에는 부모의 손을 잡고 온 학생 관객들이 많았다.

두 아들과 함께 온 한 제주 출신 관객은 "평소 아이들에게 4·3을 설명하기 참 막막했는데, 영화를 본 아이들이 먼저 '재밌다'고 말해줘서 너무 고마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에 정지영 감독은 "제주지역 중고생들에서는 이미 단체 관람이 시작됐다"며 "중앙 정부와 전국의 학교에서도 이 흐름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꺼지지 않는 '마지막 불꽃'을 위해

GV를 마무리하며 한 관객은 "재미있다고 말하기엔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재미 이상의 감동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평을 남겼다. 78년 전, 제주 땅을 붉게 물들였던 비극은 이제 스크린 위에서 우리 시대의 폭력을 성찰하는 거울이 되어 돌아왔다.

양윤호 감독은 "지금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불꽃' 같은 시기"라며 서울제주도민들의 적극적인 홍보를 부탁했다.

정지영 감독이 빚어내고 고두심이 보증한 <내 이름은>은 단순히 한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비문(碑文) 없이 누워있는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 선 모든 인간을 향한 뜨거운 연대의 메시지다.
▲ 기념촬영1 ▲관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정지영 감독(맨앞줄 왼쪽 첫 번째)과 고두심 배우(맨앞줄 가운데), 양윤호 감독
ⓒ 고창남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이 품고 나간 '먹먹함'은 이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더 큰 울림으로 퍼져나갈 준비를 마쳤다. 아프지만 아름답고, 슬프지만 재미있는 이 기묘한 영화적 체험은 전국 극장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상영 중이다.

한편, 영화 <내 이름은>은 이번 서울 상영회의 열기를 이어받아 오는 5월 말까지 제주도에서부터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릴레이 상영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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