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읽다]100만분의 1nm, 원자 세계의 문을 연다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무려 1조5000억원이 투자돼 '단군 이래 최대 과학 프로젝트'라는 한국형 중이온 가속기 라온(RAON)이 내년부터 본격 가동된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반도체 산업에 든든한 우군이 될 전망이다. 우주 비밀 탐구 등 기초 과학 연구, 첨단 소재ㆍ암 치료제 개발 등 다양한 실생활 용도로도 쓰인다. 지난 15일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첫 빔 인출 성공 후 공식 브리핑 및 현장 투어를 통해 라온의 웅장한 모습을 공개했다. 도대체 뭣에 쓰는 물건인가 하는 궁금증을 안고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위치한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로 향했다.
중이온 가속기란?
인류 문명은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됐다. 중이온 가속기도 원자핵과 같은 미세 입자들을 연구해 특성을 알아내는 게 근본적인 목적이다. 현장에서 만난 이재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조성추진단장은 "우라늄과 같이 무거운 입자를 초전도 상태에서 가속해서 희귀동위원소를 만들거나 이를 활용한 연구를 하는 시설"이라며 "핵물리학뿐만 아니라 신소재 개발, 반도체 개발, 품종 개량, 암 치료를 위한 의료용 동위원소 생성 등 쓰임새가 넓다"고 소개했다. 홍승우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도 "초기 우주에는 가장 가벼운 원소들만 있었는데 현재는 다양한 물질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물질들이 어떻게 생성됐을까 하는 의문에서 가속기 연구가 출발했다"면서 "가벼운 원소들이 여러 가지 핵반응을 통해 다양하게 진화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라온의 초기 연구 대상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라온은 2011년부터 약 11년간 우리 기술과 국내 업체들의 손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사양으로 설계·제작돼 고에너지 구간 가속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이 완공돼 지난 10월7일 최초의 빔 인출에 성공했다. 홍 소장은 "11년 전 처음 시작할 때는 사람도, 땅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직 과학자들의 꿈과 열정이 있었고 다행히 정부가 큰 예산을 지원해줘서 그 꿈이 이뤄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됐다"고 술회했다.
홍 소장에 따르면 첫 번째 빔 인출, 즉 아르곤 이온을 가속시킨 것은 무엇보다 핵심 장비인 초전도 가속관이 정상적으로 가동됐다는 의미다. 초전도 가속관은 절대 온도 4K, 즉 이온의 이동이 용이하도록 영하 269.15도 이하로 냉각돼 있어야 한다. 전 세계에서 독일, 프랑스 등의 두어 개 기업만이 가진 어려운 기술이다. 홍 소장은 "깡통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고주파가 가속관에 들어가서 실제로 입자를 가속하는 데 성공했다"면서 "그동안 설치한 시스템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가동된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아직도 첫걸음을 뗀 아기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자라고 성숙해서 계획대로 세계 최고가 되는 그런 과정이 남아 있다"면서 " 쉬운 일이 아니다. 잠 못 자는 시간과 어려움과 고난이 있었다. 앞으로도 지켜보고 격려해 달라"고 덧붙였다.
우주의 비밀을 푸는 마법 기계
이 같은 설명을 들은 후 곧바로 현장 투어가 시작됐다. 커다란 모니터들로 가득 차 마치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선 발사 관제센터를 연상케 하는 중앙제어센터를 본 후 헬륨냉각시설인 '극저온설비동'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가속기 냉각에 사용되는 액체 헬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기체인 헬륨을 여러 차례 압축·팽창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온도를 낮춰 절대 온도 4K 상태의 액체로 변화시키는 시설이다. 복잡한 기계 장치와 특수 소재, 운용 기술이 필요해 해외에서 수입됐으며, 우리나라에선 가장 큰 규모다. 만약에 헬륨 가스가 누출되기라도 하면 인명 사고가 날 우려도 있어 벽마다 감지 및 경보 장치가 부착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헬륨 냉각 시설을 떠나 도착한 곳은 지하에 위치한 고주파 전력 발생 시설이었다. 라온의 주 가속 소재인 우라늄 이온을 가속하기 위해선 강한 마이크로빔으로 전자를 쏴줘야 한다. 이때 전자에 맞아 이탈한 우라늄 이온에 1초에 약 8000만번가량 +, -를 오가는 강력한 고주파(325MHZ)를 걸어 주기 위한 전력을 만드는 곳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마치 자기부상열차의 원리와 비슷하다. 본체에 N극을 걸어 놓고 빠른 속도로 그 바로 앞의 레일에 S극을 순차적으로 계속 걸어 주면 기차가 시속 수백km로 가속하는 것과 같다.
이후 본격적으로 이온이 움직이는 가속기 시설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저에너지 구간의 54개 가속기만 설치돼 있었다. 지난 10월7일 이 저에너지 구간 가속기 중 초반 5대의 가동에 성공해 초속 3만㎞까지 아르곤 이온을 가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대 빛의 속도의 절반, 즉 초속 15만㎞까지 가속하는 것이 라온의 최종 목표다. IBS는 내년까지 한 두 차례 더 시범 운영을 해본 뒤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으로 빔 인출에 들어가 각종 연구에 활용할 예정이다. 권면 IBS 중이온가속기 사업단장은 "현재 연구 목록을 작성 중이며,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관심을 많이 받아 이런저런 제안이 들어 오고 있다"면서 "반도체 설계와 검사, 제작 과정에서도 빔을 활용해 초미세 정밀 반도체의 수율 및 품질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어 관련 업체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라온은 일종의 거대한 초정밀 관측 장비다. 100만분의1 나노미터 이하, 즉 펨토미터(fm) 크기인 원자, 중성자, 양성자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다. 이온을 가속시킨 후 충돌, 분열시키고 걸러내면서 다양한 원자핵을 만들 수 있고, 특성을 확인하는 장치다. 특히 우주대폭발(빅뱅) 3분 후의 상태를 재현할 수 있다. 우라늄 등을 이온화한 입자를 초속 15만㎞까지 가속해 표적 물질에 충돌시킨 후 이를 관찰하는 ‘되튐분광장치(KoBRA)’라는 시설을 통해 초기 우주 물질 생성의 비밀을 엿본다. 또 라온은 세계 최초로 ‘온라인동위원소분리장치(ISOL)’와 ‘비행파쇄동위원소분리장치(IF)’를 동시에 구축, 희귀동위원소 발견에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남은 과제도 있다. 당초 계획했지만 기술적 문제로 미뤄진 고에너지 구간 건설을 통해 시설을 완공해야 생명 현상 연구나 뮤온 물질의 구조. 자성체, 소재 개발 등을 연구할 수 있다. 이 단장은 "고에너지 가속관 구간도 설계 및 시제품까지 만들었지만 충분한 성능을 확보하기 위한 정밀도·후처리 등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경험이 부족했고 시행착오가 있었다"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년부터 선행 연구개발(R&D)에 들어가며, 이르면 2025년 이전에 설계를 마치고 구축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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