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가 묻는다, 황폐한 현실에서뭘 할 것인가 [수산봉수 제주살이]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이봉수 기자]
▲ 둘째 날인 29일 오전 김남주 시인 생가 마당에서 열린 청년문학제를 마치고. |
ⓒ 송경동 |
"돌이켜보건대 김남주는 끝내 어떤 타협주의나 거짓된 해답으로 기울지 않았다. 그의 삶은 민중해방과 민주주의 그리고 조국의 자주통일이라는 대의에 헌납된 번제(燔祭)의 제물과도 같았다. 그 대의의 실현을 위해 그는 평생 생활과 의식, 시와 삶을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티없이 맑은 도덕적 순결, 한없는 헌신성과 샘솟는 열정, 수많은 시작품으로 승화된 고귀한 정신세계는 30주기를 맞은 오늘 이 시대에 더 찬란한 샛별로 빛난다. 한반도 차원에서나 전 지구적 차원에서나 그의 살아생전보다 비할 수 없이 더 위험하고 황폐해진 현실은 새삼 김남주의 열정과 헌신을 이 땅으로 호출하고 있지 않은가."
땅끝 고을 해남에서 열린 '김남주 시인 30주기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한 기조강연 내용이다. 긴급조치와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으로 세상이 얼어붙은 1974년, <창작과비평> 주간이던 염무웅 덕성여대 교수에게 김남주가 투고한 시들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감동'이었다.
염무웅은 "서슬 퍼런 공포의 계절에 마주친 '잿더미'와 '진혼가' 등 8편의 작품은 죄어드는 현실의 억압을 뚫고 솟아오른 거침없는 문학적 발언이고 살아있는 정신의 시적 폭발로 느껴졌다"고 한다.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박토에서 어떻게 군거(群居)하던가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죽창을 깎고 있던가' ('잿더미' 제6연 일부)
▲ 익천문화재단 이사장인 염무웅 평론가가 ‘오늘 다시 호출된 김남주’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
ⓒ 한승훈 |
그는 9년 3개월 투옥기간에 무려 360편의 시를 썼다. 염무웅은 "가장 열악한 조건을 딛고 가장 치열한 창작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옥중시는 그야말로 '세계기록유산'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감옥은 감옥이 아니다
인간의 소리를 차단하는 벽도 아니고
자유의 목을 졸라매는 밧줄도 아니고
누군가 노리고 있는 공포와 죽음의 집도 아니다
감옥은 팔과 머리의 긴장이 잠시 쉬었다 가는 휴식처이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독서실이고 정신의 연병장이다'
('정치범들' 제3연)
동학의 보은집회를 떠올리게 한 해남집회
▲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심포지엄 참석자들. 앞쪽에 황지우 시인(왼쪽부터), 김판수 익천문화재단 이사장, 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 등의 모습이 보인다. |
ⓒ 한승훈 |
1박2일 일정은 한 작가를 기리는 행사가 이토록 성대하게 열린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알차게 짜였다. 첫날 저녁에는 김남주와 박광숙의 옥바라지로 맺어진 사랑 얘기를 시극으로 연출한 <은박지에 새긴 사랑>이 공연됐고, 이어 '전국문학인의 밤'이 깊어 갔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한국작가회의 회원 등 500여 명이 김남주의 문학을 기억하고 작가정신을 계승하는 자리였다.
길동무문학학교 김명환 교장은 "김남주기념사업회 김경윤 회장 등 현지 문인들이 굉장히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고 최근 몇 달 동안 신경림·송기원 선생님 등 문단 원로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예상 밖으로 많은 문인과 문학애호가들이 모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김남주를 얼마나 건성으로 알았던가
제주에 살면서 두 가지 불편한 점은 가고 싶은 행사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것과 의료취약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익천문화재단(이사장 김판수·염무웅)이 함께하는 1박2일 '길동무 문화예술산책'에 동행하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의료대란 덕분'이다. 제주에서 정기신체검사를 했다가 상급병원에서 긴급히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제주대병원도 서울대병원도 초진환자는 받지 않는다는 거였고 강남성모병원은 2월에나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 <김남주 평전>과 <김남주 시전집> 표지. |
ⓒ 다산책방, 창비 |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그 낫으로'
김남주는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는 에세이 모음집에서 어느 노동자가 낫이 너무 섬뜩하다고 불평하자 망이·망소이 난까지 들먹이며 이렇게 답한다.
"노예가 노예인 것은 자기가 노예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자나, 그것을 깨닫고는 있으면서도 주인이 무서워서 노예이기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냥 눌러사는 그런 경우입니다."
복원이 유적지 훼손이 되고 마는 현실
▲ 증축된 다산초당은 초가집의 원래 면모를 찾아볼 수 없지만, 네모난 연못에는 둥근 섬을 만들어 놓아 전통조경의 공간개념을 보여준다. |
ⓒ 이봉수 |
▲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 다산초당의 구조까지 그려져 있어 그대로 복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큰 기와집을 유적지 복원이랍시고 해놓았다. |
ⓒ 강진군청 |
▲ 새로 만든 천일각은 바위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다산의 유적지를 훼손한 꼴이 됐다. |
ⓒ 이봉수 |
다산은 유배지에서 작은 초가집에 살았지만 우주를 생각했다. 다산초당 옆에는 사각형 연못에 원형 섬이 있는데, '천원지방'(天圓地方) 곧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동양의 전통조경 공간개념이 적용돼 있다.
다산은 민생을 살핀 개혁사상가였지만, 못난 후세 사람들의 겉치레 공경이 지나쳐 다산을 오히려 욕되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현상은 전국 곳곳에서 목격된다. 안동 도산서원도 원래는 작은 마루와 부엌이 딸린 단칸방 구조의 도산서당이었는데 후세인들이 성역화를 한답시고 호화 건축물 단지를 만들어놨다.
40년이 다 된 오연호·나희덕과의 인연
▲ 숙소에서 벌인 간단한 파티가 자정을 훌쩍 넘겼다. 맨 오른쪽이 이대흠 시인, 다음이 나희덕 시인, 왼쪽에서 두 번째가 송경동 시인. |
ⓒ 이봉수 |
그의 이름은 오연호. 내가 <한겨레신문> 창간요원으로 일하던 시절 그가 <말>지 기자라며 찾아와 인사하면서 "그때 고기를 사주셨다"며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나는 나중에 <오마이뉴스>를 창간하는 오연호의 가치를 맨 먼저 알아본 '제도권 기자'였던 셈이다. 그 학회지에는 오연호가 쓴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의 '시작하는 말'이 실려 있는데, 당시 맞춤법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 책이 여러분께 전달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읍니다. 윗옷속에 원고뭉치를 숨겨넣고 다니면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들이 아직 한반도의 구석속에 많이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느낍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그 모습은 어떤 것인지 아직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을 위한 오늘의 과정들은 계속되어야 하며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연세대 국문학과 학회지 <통일>의 표지에는 녹두장군 전봉준 판화가 제대로 찍히지 않아 검은 사인펜으로 덧칠을 해놓았다. 오른쪽은 나희덕의 육필시 ‘저녁버스 속에서’. |
ⓒ 이봉수 |
김남주의 시정신 계승을 다짐한 청년문학제
'"자유 좀 주세요 자유 좀 주세요
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애걸복걸하면서
동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직립의 인간인 나는"(그의 시 '자유에 대하여')
이라고 노래했던 한 시인은
눈 많이 내린 1994년 2월 13일
그를 낳아 준 남녘땅 전역에 눈부신 수의를 덮어주고
마침내 마지막 감옥이었던 육신으로부터 탈옥하였다
그 육신은 죽음을 받아들여 누웠지만
그의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웠다'
나희덕 시인은 김남주의 시 '이 가을에 나는'을 낭송했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송경동 시인은 김남주의 '나 자신을 노래한다'는 시를 낭송했다.
'묻노니 그들에게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자기 희생 없이 어떻게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단 말인가
혁명은 전쟁이고
피를 흘림으로써만이 해결되는 것
나는 부르겠다 나의 노래를
죽어가는 내 손아귀에서 칼자루가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혁명시인
나의 노래는 전투에의 나팔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나는 찬양한다'
이 대목에서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송 시인은 자신의 인생행로와 상당부분 겹치는 시를 소리 높여 외치다가 뒷장에도 시가 계속된다는 걸 깜박 잊고 단상을 내려가버렸다.
실수마저 열정으로 받아들인 청년문학제를 마무리하는 말은 김남주 시인의 부인 박광숙이 했다. 후원자와 행사준비요원, 그리고 참여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뒤 제가 드릴 것은 생가 뒤 푸른 대숲의 바람과 해남의 푸른 하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해남에 꼿꼿한 문인이 많은 이유
▲ 고산 윤선도 생가인 녹우당 입구에 서있는 500년 수령 은행나무. |
ⓒ 한승훈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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