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은 팀 안팎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이 한 마디가 현실에서 증명되기까지 약 50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작 손흥민이 없으니 그의 영향력을 알게 됐다. 13일 오후 영국 울버햄턴 몰리뉴 스타디움에서 열린 울버햄턴과 토트넘의 프리미어리그 32라운드 경기에는 손흥민이 없었다. 그러나 이 경기를 통해 손흥민은 다시 부각됐다. 역설적이었다.
울버햄턴과의 경기를 이틀 앞둔 11일 오후. 토트넘 홋스퍼 트레이닝센터에서는 경기 전 공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손흥민이 화두에 올랐다.
Q: 손흥민이 가지는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A: 손흥민 선수는 여전히 팀 내외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선수입니다. 팀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고, 어제도 많은 기회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공격진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공격을 잘 풀어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손흥민 선수는 클럽에도,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성에도 매우 중요한 선수입니다.
그래도 영국 기자들은 집요했다.
Q: 손흥민의 폼이 예전같지 않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경기 중 손흥민의 리더십을 얼마나 신뢰하나요?
A: 손흥민 선수는 여전히 안팎으로 팀의 리더입니다. 동시에 다른 선수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합니다.
우리는 여러 리더들이 함께 책임을 나누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팀은 아직 경험이 적은 젊은 선수들이 많고, 그들이 이런 큰 무대에서 겪는 걸 도와줄 리더들이 필요하거든요.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설명에도 영국 기자들은 미덥지 못한 모양이었다. 손흥민을 의심하는 기사들이 꽤 나왔다.
기자회견 47시간 후. 몰리뉴 앞에는 토트넘의 버스가 들어왔다. 선수들이 모두 내렸다. 응당 있어야 할 선수가 없었다. 손흥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예 원정에 따라오지 않았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경기 전 중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타박상이 있었고 부상 예방 차원에서 데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수 보호이자 동시에 17일 열리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유로파리그 8강 2차전을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손흥민은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경기는 경악 그 자체였다. 토트넘은 무기력했다. 2대4로 완패했다.
통계부터 살펴보자. 점유율만 높았다. 의미없었다. 늘 그렇듯 변죽만 울렸다. 백패스와 횡패스만 남발했다.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패스가 별로 없었다. 슈팅 역시 11개로 울버햄턴(13개)보다 적었다. 유효슈팅도 4개로 5개의 유효슈팅을 기록한 울버햄턴보다 적었다. 빅찬스는 2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이 역시 울버햄턴(4개)보다 적다.
손흥민을 대신해 나온 공격수들은 어땠을까. 손흥민 자리에 마티스 텔이 출전했다. 한 골은 넣었다. 그러나 이 골은 울버햄턴의 수비수인 세메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이었다. 자신이 잘해서 만든 골은 아니었다. 왼쪽 측면에서 그 어떠한 영향력도 없었다. 다른 공격수들도 별반 차이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무기력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전술인 '엔지 볼' 아래에서 손흥민의 역할은 까다롭다. 상대를 끌어내야 하는 미끼 역할을 한다. 왼쪽 측면에서 볼을 잡으면 풀백이 뒷공간을 오버래핑하든, 언더래핑하든 치고 들어간다. 이 타이밍에 맞춰서 볼을 내주고 자신은 움직인다. 수비수가 따라온다. 다시 볼을 받게 되면 비어있는 반대편으로 패스를 내주고, 오른쪽 윙어나 풀백이 마무리하는 형태로 패턴플레이를 한다. 축구 지능과 노련함이 필요한 역할이다. 여기에 왼쪽 풀백들의 공격 가담이 많다보니 역습을 허용하게되면 수비도 해야 한다. 올 시즌 손흥민의 스프린트는 전방을 향하기도 하지만 후방 지향적이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선수가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도 팀의 구심점을 잡아주는 이도 없었다. 주장이라면 팀이 힘들거나 어려움에 겪었을 때 수많은 대화와 격려(때로는 독려)로 무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TV 중계 화면 바깥에서 손흥민은 이런 역할을 잘해주었다. 손흥민이 없으니 그 누구도 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주장 완장을 차고 나온 제임스 매디슨도, 터프한 인상으로 잉글랜드 아저씨들의 사랑을 받는 로메로도 분위기 반전에 도움이 될만한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토트넘 선수들의 경기력은 지리멸렬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교체 타이밍을 빠르게 잡았다. 새로 들어간 선수들 중에도 경기를 바꿀 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경기력을 보여줄 선수는 없었다. 쓸만한 카드가 없었다. 손흥민만한 선수가 없었다.
충격적인 졸전 후 패배를 목격하고서야 영국 기자들의 톤도 조금 바뀌었다. 손흥민을 찾았다.
Q:손흥민과 오도베르는 목요일 경기에 나올 수 있을까요?
A:괜찮을 겁니다, 손흥민은 타박상이 있었고 오늘 원정에 데려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윌슨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말했듯이, 그의 몸 상태를 관리하고 있었고, 목요일 밤 경기에 맞춰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 영국이니까 영어로 하면 'A picture is worth 1000(one thousand) words'.
올 시즌 토트넘은 불만족스럽다. 그리고 손흥민 없는 토트넘은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