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검사 말에 11억 송금”…‘10억 이상’ 초고액 보이스피싱 77% 급증
2024년 11월, 70대 윤모씨에게 신청한 적 없는 신용카드가 발급돼 배송됐다는 문자가 왔다. 발신번호로 전화하자 일당은 금융감독원에 명의도용 신고를 하라며 다른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이후 금융감독원 직원과 검사를 사칭해 “계좌가 30억원 규모 범죄에 연루돼 영장이 발부됐다”고 겁을 줬다. 이어 약식기소를 받으려면 예금을 모두 해지해 지정 계좌로 송금하라고 지시했다.
윤씨는 14차례에 걸쳐 남편이 남긴 유산 등 11억2770만원을 보냈다. 일부 가담자가 처벌받았지만 지금까지 돌려받은 돈은 6000여 만원뿐이다. 지난 8월에는 경찰로부터 사건이 조만간 관리미제로 등록될 예정이라는 통보도 받았다. 윤씨 측은 “유산을 잃었다는 자책과 상실감에 매일 눈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예금과 노후 자산까지 한꺼번에 빼앗는 거액 보이스피싱 피해가 확산하고 있다. 윤씨처럼 보이스피싱으로 10억원 이상을 잃은 초고액 피해자가 지난해 77% 급증했다. 1억원 이상 피해자도 66% 늘어 3000명에 육박했다. 전체 피해액은 사상 처음 1조원을 넘어섰다.
18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손명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과 금융감독원 등에서 받은 자료의 골자다. 지난해 10억원 이상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55명으로 2024년(31명)보다 77.4% 늘었다. 1억원 이상 피해자는 1793명에서 2979명으로 1186명(66.1%) 증가했다. 올해 1~9월에도 1억원 이상 피해자 981명 중 27명이 10억원 이상을 잃었다.


지난해 전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1조2578억원으로 사상 처음 1조원을 돌파했다. 2023년(4472억원)의 2.8배다. 하루 평균 64건이 발생해 34억원 넘는 피해가 났고, 1억원 이상 피해자도 하루 평균 8명에 달했다. 1인당 평균 피해액도 2024년 4100만원에서 지난해 5384만원으로 늘었다.
고액 보이스피싱 피해에 자주 동원되는 수법은 금융·수사기관 사칭이다. 지난해 기관사칭형 피해액은 9884억원으로 전체의 78.6%를 차지했다. 윤씨가 당한 ‘카드배송 사칭’도 카드 발급 확인을 유도한 뒤 검찰·금감원 직원을 사칭해 범죄 연루를 주장하는 수법이다. 금감원은 지난해 2월 이 수법에 대한 소비자경보를 ‘주의’에서 ‘경고’로 높였다. 고령 여성의 고액 피해도 두드러졌다. 금감원에 따르면 2024년 하반기 보이스피싱으로 2억원 이상을 잃은 피해자의 약 80%가 여성이었고, 60대 여성이 과반을 차지했다.
피해 규모가 커지는 가운데 피해금을 되찾기는 여전히 어렵다. 피해금 환급률은 2021년 35.9%에서 지난해 26.3%로 9.6%포인트 하락했다. 범죄 조직이 돈을 여러 계좌로 빠르게 분산·인출하면 지급정지 후에도 회수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초고액 피해가 늘고 환급률이 낮아지면서 은행의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FDS)을 통한 사전 차단도 과제로 떠올랐다. 은행이 자체 운영하는 FDS는 평소 거래하지 않던 계좌로 거액을 송금하는 등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고객에게 전화하거나 추가 인증을 요구하고, 필요하면 송금을 일시 중단하는 시스템이다. 금융당국도 2023년 10월 은행권이 공통으로 활용할 탐지 기준 51개를 제시했지만, 진화하는 범죄 수법을 잡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금융위원회는 지난 5월 신종 피싱 6종과 대포계좌 9종을 겨냥한 탐지 기준 초안을 추가로 내놨다.
손명수 의원은 “보이스피싱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잃는 초고액 피해자가 급증하고 있다”며 “고액·반복 송금 등 이상거래를 조기에 탐지하고 피해금을 신속히 동결·환급할 수 있도록 금융당국의 대응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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