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권은 내려왔지만 자치는 내려오지 않았다

이권능 2026. 9. 1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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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지방정책은 최근 다시 큰 변화를 맞고 있다. 중앙정부의 권한과 재정을 지방정부로 이전하는 지방분권이 계속되고 있고, 5극 3특과 초광역협력, 공공기관의 추가 지방이전, 지역 전략산업과 지방국립대학 육성 등 국가균형성장과 지역발전 정책도 강화되고 있다.

지금의 정책은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지역발전에는 상당한 힘을 싣고 있지만, 주민 주도의 지방자치에는 상대적으로 미온적이다.

유럽지방자치헌장은 지방정부는 법률에 따라 배제되지 않은 지역문제에 폭넓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일반권한의 원칙과 공적 책임은 가능한 한 주민에게 가까운 수준에서 우선 담당한다는 보충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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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보다!] (9) 읍·면·동 아래 ‘생활권자치’가 필요한 이유
이권능 / 사단법인 한국지역혁신연구원 연구위원

우리나라의 지방정책은 최근 다시 큰 변화를 맞고 있다. 중앙정부의 권한과 재정을 지방정부로 이전하는 지방분권이 계속되고 있고, 5극 3특과 초광역협력, 공공기관의 추가 지방이전, 지역 전략산업과 지방국립대학 육성 등 국가균형성장과 지역발전 정책도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이 제대로 자리 잡는다면 수도권에 집중된 자원과 기회가 지역으로 분산되고, 지역에서 배우고 일하고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조건도 크게 좋아질 것이다. 지방정부가 담당하는 기능과 역할 역시 자연스럽게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긍정적 흐름에도 한 가지가 미흡해 보인다. 지금의 정책은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지역발전에는 상당한 힘을 싣고 있지만, 주민 주도의 지방자치에는 상대적으로 미온적이다. 올해 4월14일 「지방자치법」 개정을 통해 주민자치회의 법적 기반이 마련되어 10월 시행을 앞두고 있고, 행정안전부의 2026년 참고조례는 주민총회 의결범위 확대, 자치계획과 주민참여예산의 연계, 연계 법인을 통한 공공서비스 수행 등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이 자신의 생활문제를 직접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한과 공간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문제는 권한뿐 아니라 자치의 '크기'다

지방자치는 '어떤 권한을 줄 것인가'만큼이나 '어느 규모에서 자치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현재 주민자치회는 읍·면·동을 단위로 한다. 그러나 읍·면·동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위로서는 적절할 수 있어도, 주민들이 공동의 생활문제를 직접 논의하고 결정하는 자치의 공간으로서는 지나치게 크다. 제주의 경우 43개 읍·면·동의 평균인구는 약 1만 5천 명이고, 제주시의 행정동은 평균 약 2만 명에 가깝다. 농촌의 읍·면도 하나의 행정구역 안에 서로 다른 역사와 생활권 그리고 이해관계를 가진 마을이 보통 10개 이상 포함되어 있다. 이런 규모에서 하나의 주민자치회가 읍·면·동 전체 주민의 생활문제를 세밀하게 파악하고 공동의 결정을 만들어 내기란 쉽지 않다.

주민참여예산을 보면 이러한 한계가 쉽게 드러난다. 여러 마을에 예산을 골고루 나누면 개별 사업의 규모가 지나치게 작아지고, 일부 지역에 집중하면 다른 지역과 갈등이 발생한다. 이는 주민자치위원의 역량 부족이라기보다 자치의 지리적 관할권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다. 행정은 전문성과 효율성을 위해 어느 정도 규모가 필요하지만, 자치는 주민들이 서로의 문제를 이해하고 공동의 결정을 내리며 그 결과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야 한다.

유럽의 최하위 자치단위는 생각보다 작다

유럽 지방자치 규모가 이를 뒷받침한다. 2024년 OECD 자료에 따르면, 주민이 대표를 직접 선출하는 최하위 지방정부의 평균인구는 프랑스 1,951명, 스위스 4,121명, 오스트리아 4,325명, 스페인 5,855명, 독일 7,792명, 이탈리아 7,474명이다 (OECD (2024), Subnational Governments and Infrastructure Finance: 2024 Edition, OECD, "Municipality size" table). 국가별 제도와 권한에는 차이가 있지만 수천 명 규모에서 주민대표와 자치제도가 운영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작은 규모에서 지방자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제주에서 유럽과 같은 규모를 찾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읍·면지역의 법정리는 평균 약 1,300명이고, 서귀포시 법정동은 평균 약 4,500명이며, 제주시 법정동은 평균 약 9,300명 정도다. 따라서 읍‧면지역에서는 인접한 2~4개 마을을, 서귀포시 동지역은 하나의 법정동을, 제주시 동지역은 법정동을 2~3개로 나누면, 대략 2천~5천 명을 중심으로 생활권을 구성할 수 있다. 물론 인구수만으로 생활권을 기계적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 통학, 교통, 장보기, 돌봄, 공공시설 이용, 역사적 마을관계 등 실제 주민들의 생활관계를 우선 고려해야 하며, 특정 숫자를 맞추거나 행정 편의상 그어 놓은 경계여서는 안 된다.

유럽지방자치헌장의 원리를 우리 방식으로 구현하기

생활권자치의 적정 규모를 정했다고 해서 자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질문은 그 생활권에서 주민들이 무엇을 함께 결정하고 실제로 수행할 것인가이다. 자치의 공간이 작아져도 주민의 일상과 연결된 기능이 없다면 생활권자치회는 또 하나의 회의기구에 머물 수 있다. 결국 돌봄·이동·건강·문화·환경·생활관리처럼 주민의 삶과 직접 연결된 영역을 어디까지 주민의 결정과 실행에 맡길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 점에서 「유럽지방자치헌장」이 제시하는 일반권한과 보충성의 원리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유럽지방자치헌장」은 지방정부는 법률에 따라 배제되지 않은 지역문제에 폭넓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일반권한의 원칙과 공적 책임은 가능한 한 주민에게 가까운 수준에서 우선 담당한다는 보충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유럽의 지방정부들은 이에 따라 돌봄·사회서비스·도시계획·건강·문화·환경 등 주민의 일상과 밀접한 기능을 폭넓게 담당한다. 다만 이를 모두 공무원이 직접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정부가 공공재정을 책임지면서 비영리조직이나 사회연대경제조직 등 다양한 지역주체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도 활용된다.

우리도 이 원리들을 우리 현실에 맞게 구현할 수 있다. 생활권자치회는 우선 주민총회·자치계획·주민참여예산·공동체활동 등 현재 가능한 기능부터 맡고, 기존 돌봄·문화·환경·공동체 사업에도 주민조직과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앞으로 공공서비스와 사회서비스가 확대되면, 그 가운데 생활권에서 수행하기 적절한 사업은 생활권자치회와 주민조직이 더 많이 담당하도록 하면 된다. 지방정부는 공공책임과 재정을 확대하고, 생활권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주민 가까운 곳에서 결정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공서비스의 확대와 함께 생활권의 결정·실행 영역이 넓어질수록 보충성의 원리와 일반권한의 취지도 우리 방식으로 점차 구현될 수 있다.

생활권자치회의 위치와 운영체계

현행 읍·면·동 주민자치회는 유지하되, 그 아래 주민의 실제 생활권을 단위로 '생활권자치회'를 두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생활권자치회는 주민자치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기본단위가 되고, 읍·면·동 주민자치회는 여러 생활권자치회를 연결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 구조다. 생활권자치회는 주민총회를 통해 공동문제를 논의하고 자치계획을 수립하며, 주민참여예산의 우선순위와 돌봄·이동·생활환경·공동시설 관리처럼 생활권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결정한다. 여러 생활권에 걸치는 공동시설이나 교통, 읍·면·동 전체 계획은 읍·면·동 주민자치회가 조정한다.

생활권자치회는 단순한 의견수렴기구가 아니라 주민이 결정하고 실행하는 자치의 중심기구가 되어야 한다. 생활권 주민이 공동의 문제와 사업방식을 정하면, 협동조합·사회적협동조합·마을기업 등 마을기반 사회연대경제조직이 이를 실행하고 주민총회가 다시 평가하는 구조다. 돌봄은 주민이 만든 돌봄조직이, 생활이동은 지역 협동조합이, 공동시설이나 환경관리는 마을조직이 맡을 수 있다. 결국 주민자치는 주민이 결정하고, 주민이 만든 조직이 실행하고, 주민이 평가하는 구조​로 발전해야 하며, 이 지점에서 주민자치와 사회연대경제가 결합한다. 그리고 결합의 매개체가 생활권자치회이다.

조례를 통해 먼저 시작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지방정부 계층을 당장 만들 필요는 없다. 현행 법률상의 주민자치회는 읍·면·동 단위에 그대로 두고, 조례를 통해 그 아래 생활권 단위의 자치기구를 두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실제 사례도 있다. 「고양시 주민자치회 및 주민자치센터 설치·운영에 관한 조례」는 법정동·마을단위 등 주민이 더 밀접한 자치를 할 수 있는 적정구역에 주민자치회의 하위기구인 '분회'를 둘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고양시의 분회와 같은 하위 자치기구를 '생활권자치회'로 설계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이권능 / 사단법인 한국지역혁신연구원 연구위원

생활권자치회는 생활권 주민총회, 자치계획, 주민참여예산 사업 발굴과 우선순위 결정, 공동체사업 등을 주요 기능으로 담당하고, 읍·면·동 주민자치회는 생활권 간 조정과 전체계획의 종합을 담당하도록 하면 된다. 물론 지방정부가 공식적으로 위탁한 사무나 독립적인 계약권처럼 더 강한 공적 권한까지 생활권자치회에 부여하려면 장기적으로 법률 개정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권한을 완성한 뒤 시작할 필요는 없다. 몇 개 읍·면·동에서 생활권자치회를 시범운영하면서 적정 인구와 공간규모, 대표자 구성, 주민총회 방식, 읍·면·동 주민자치회와의 역할 분담을 검증하고, 경험을 축적하면서 단계적으로 발전시키면 된다.

분권 다음에는 자치가 내려와야 한다

우리나라의 지방정책은 지역을 강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중앙정부의 권한은 지방정부로 내려오고 있고, 산업과 대학, 공공기관과 투자가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 그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강한 지방정부와 강한 지역경제에 더해,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민자치의 단계로 가야 한다. 읍·면·동에는 주민자치회를 두고, 그 아래 주민이 실제로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는 생활권자치회를 두어,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며 평가할 수 있도록 하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행정조직이 아니다. 지금 비어 있는 주민의 자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분권은 상당히 내려왔다. 이제 자치가 내려올 차례다. <이권능 / 사단법인 한국지역혁신연구원 연구위원>

제주의 담론을 잇는 연재 '지역,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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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보다!'는 사단법인 한국지역혁신연구원의 필진이 참여하는 칼럼 코너로서 지역을 둘러싼 다양한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내고, 지역의 가능성과 미래를 탐색하는 공간입니다. 현장 경험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공동체, 사회보장, 경제, 일자리, 환경, 에너지, 문화, 정치참여 등 다양한 주제를 지역의 관점으로 다루면서 지역을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사회 변화를 모색하는 담론을 독자들과 함께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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