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피는 물보다 진할까…반전의 가족극 ‘철들 무렵’ [쿡리뷰]

심언경 2026. 9. 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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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매일 로또 1등을 빌었지만 암 4기에 당첨되고, 딸은 단역에도 서사를 부여할 만큼 연기에 진심이지만 배역 이름도 본인 사인도 없다. 엄마는 일찌감치 이들에게서 독립해 싱글에 준하는 삶을 꾸렸는데 웬걸, 사방이 훼방꾼이다.

한때 한 집에서 살을 맞대고 살았던 이들이지만 이젠 까마득한 옛이야기다.

서사는 이들 가족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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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철들 무렵’ 스틸. ㈜인디스토리 제공

아빠는 매일 로또 1등을 빌었지만 암 4기에 당첨되고, 딸은 단역에도 서사를 부여할 만큼 연기에 진심이지만 배역 이름도 본인 사인도 없다. 엄마는 일찌감치 이들에게서 독립해 싱글에 준하는 삶을 꾸렸는데 웬걸, 사방이 훼방꾼이다. 사실상 이혼한 남편도 장성한 딸도 손을 벌려 오고, 형제들은 “우린 가족이 있다”며 그저 구순을 맞은 어머니를 떠넘기려 혈안이다. 철저히 분리됐지만 느슨한 연결이 지속되고, 가족이 있어서 가족과 함께할 수 없다니, 정말 피가 물보다 진한 게 맞는 걸까. 영화 ‘철들 무렵’(감독 정승오)은 이 아이러니 같은 현실을 재치 있게 그린 가족극이다.

영화는 제각기 흩어져서 삶을 꾸리고 있는 철택(기주봉), 정미(하윤경), 현숙(양말복)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한다. 한때 한 집에서 살을 맞대고 살았던 이들이지만 이젠 까마득한 옛이야기다. 이때 사건이 발생한다. 철택의 흉선에서 암을 발견한 것이다. 분투 속 어찌어찌 이어왔던 평화의 날은 끝난다.

정미는 본인 하나 건사하기 힘들면서 철택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식습관 참견은 기본, 병원 수속을 밟을 때도 모든 질문에 대신 답한다. 하지만 진짜 보호자가 되진 못한다. 무명 배우인 정미는 수천만원에 달하는 병원비를 감당할 경제력이 없다. 홀로 정미를 길러낸 철택의 수중에는 300만원뿐이다. 그저 두 사람의 짜증만 늘어간다. 남이나 다를 바 없는 현숙도 급작스럽게 철택의 삶에 끼어든다. 10년 넘게 별거 중인 법적 아내의 존재는 기초생활보장을 신청하려는 철택을 가로막는다. 이렇듯 철택은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서 불편한 연결을 확인한다.

서사는 이들 가족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는다. 철택의 형 관택(김종구)은 대학을 나오고도 변변찮게 사는 동생이 항시 못마땅하다. 그 정도가 지나쳐 유치원생 손자 앞에서도 흉을 볼 정도다. 현숙의 남매들은 현숙의 싱글 라이프를 우습게 여기고 이용한다. 어머니 옥남(원미원)의 구순잔치를 죄다 떠맡기더니 부양까지 하란다. 자꾸 현숙이 외롭고 이기적인 사람인 양 몰아간다. 현숙은 그럴수록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모든 것과 단절되려고 애쓰지만 가족은 자꾸 숙명처럼 파고든다. 유일하게 반가운 방문객 정미는 효도계약서를 들고 왔다. 딸이야말로 애틋한 가족이지만 계약을 맺는 개개인으로 치환된다.

영화 ‘철들 무렵’ 스틸. ㈜인디스토리 제공

이 모든 이야기는 옥남의 내레이션 아래 놓인다. 옥남은 자신이 거친 질곡의 시대에 대한 박완서 작가의 문장을 읽어 내려간다.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 개인보단 공동체가 우선시됐던 과거와 개인의 행복을 좇는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의도적으로 삽입해 전개상 튀는 인상이 있지만, 옥남은 마지못해 자신을 모시겠다는 현숙에게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의 낭독극을 완성한다. 정미나 현숙의 남매들이나 자식은 부모를 제대로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부채감만 느끼고, 정작 부모는 구순이 돼서라도 나 자신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나한테 니들은 과거”라며 미래를 그려보겠다는 옥남의 선언은 인물들에게나 관객들에게나 가장 큰 반전이다.

‘철들 무렵’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2관왕(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송원 시민평론가상)을 차지했고, 제28회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관객 투표로 결정되는 땡그랑동전상을 수상했다. 이 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스토리를 더욱 실감 나게 구현하는 배우들의 연기, 이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정승오 감독의 재기 발랄한 편집이 강점이다.

차와 병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기주봉과 하윤경의 섬세한 감정 표현은 더욱 빛을 발한다. 투병과 간병에 지쳐 날선 말을 주고받은 부녀는 ‘로또 1등’이라는 가장 먼 미래를 꿈꾸며 화해한다. 이날 밤 침대에서 숨죽여 우는 이들의 모습은 특히나 가슴이 시리다. 각각 다른 이유로 절망에 빠진 철택과 정미가 거울을 보며 우악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시퀀스에서는 두 배우의 열연은 물론, 정 감독 특유의 리듬감과 유머가 돋보인다. 보편적이지만 무거운 소재, 독창적이면서 깊이 있는 발상을 자신만의 색채로 엮어내는 것이 정 감독의 인장으로 자리잡는 모양새다.

1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05분.

심언경 기자 notglasses@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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