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증손자' 김용만 의원, '증조부 친일 행적' 하영에 일침 "부모 선택 불가하지만…"

유정선 2026. 8. 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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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김용만 의원이 '친일 행적 증조부 논란'에 휩싸인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에 일침을 날렸다.

김용만 의원은 JTBC '뉴스룸' 인터뷰 코너 '단도직입'에 출연, 최근 불거진 하영의 증조부 친일 논란에 대해 "우리가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날 때 부모를 결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더 중요한 것은 선조의 발걸음에 대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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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가 백범 김구(사진 왼쪽)·배우 하영.ⓒ공훈전자사료관,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 제공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김용만 의원이 '친일 행적 증조부 논란'에 휩싸인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에 일침을 날렸다.

김용만 의원은 JTBC '뉴스룸' 인터뷰 코너 '단도직입'에 출연, 최근 불거진 하영의 증조부 친일 논란에 대해 "우리가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날 때 부모를 결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더 중요한 것은 선조의 발걸음에 대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있다"고 짚었다.

이어 "선대의 과오를 역사 정의 측면에서 해석하고 행동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한다면 국민이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속설에 대해서는 "현실이 그렇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연소득이 2500만 원대로 중위 소득보다 낮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올해 12월 출범을 앞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기대도 밝혔다. 김 의원은 "2000년 이후 재산 환수를 한 번 시도했지만, 파악한 은닉 재산 중 5%도 환수하지 못했다"며 "불법 획득한 재산을 현금화해서 처분했더라도 환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2025년 6월26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제76주기 추모식에서 김구 선생 증손자인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리하고 있다.ⓒ뉴시스

앞서 하영은 4대째 이어진 의사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혔다가 증조부인 안상호의 친일 의혹이 제기됐다. 광복절을 며칠 앞둔 시기라 논란은 더욱 거세게 일었다.

안상호는 일제강점기 시대 의사로 1872년 출생했으며, 1927년 향년 55세로 서울 종로구에서 사망했다. 묘소는 경기 안성시 죽산면 당목리에 있다.

일본에서 근대 의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서울 종로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인 병원을 개원한 초기 개업의 중 한 명으로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면허를 취득한 인물이기도 하다.

1916년에 결성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대정친목회에 초대 평의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했다. 대정친목회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중심으로 총독부 통치에 협력하며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라는 '내선융화(內鮮融和)'를 퍼뜨린 단체다.

1919년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쓰러졌을 당시 진료를 본 것으로도 알려졌다.

고종은 1885년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고 교육을 통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겠다는 뜻을 선언했다. 이에 조선 말기 정부는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젊은 인재들을 외국에 보냈는데 하영 증조부 안상호도 역시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의 국가장학생과 같은 개념인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비슷한 시기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근대 의학을 배운 김익남과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김익남은 안상호보다 3년 앞서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1900년 귀국해 '관립의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했다. 일본인 의사들이 조선 의료계를 위협하자 조선 의사들로 구성된 '의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의사연구회는 대한의사협회의 전신으로 당시 김익남은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북만주로 망명한 그는 교민들 치료에 앞서며 독립 운동에 힘쓴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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