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이 만든 ‘오디세이’는 달랐다…영웅 신화 뒤집은 이 장면

윤성민 2026. 8. 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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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고대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영화로 해석한 작품이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지난 5일 국내 개봉한 영화 ‘오디세이’는 호메로스 『오뒷세이아』의 얼개를 따르지만, 이야기를 추동하는 정서는 전혀 다르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야심은 원전과 각색의 그 간극 속에 담겨 있다. 요컨대 영웅 귀환의 서사를 죄의식과 성찰의 서사로 다시 써보려는 야심이다.(※『오뒷세이아』는 을유문화사 번역 참고. 스포일러 포함)


①지략 대 회한


전체 24권으로 이뤄진 『오뒷세이아』에 트로이 목마는 4권과 8권 두 번 등장한다. 4권은 오디세우스가 목마 안에서 소리치려는 전사의 입을 막아 모두를 살린 이야기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구했소, 모든 아카이아인들을”이라며 오디세우스를 업적을 전한다. 8권은 오디세우스가 시인 데모도코스에게 자신이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를 함락한 이야기를 노래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다. 트로이 목마는 위대한 지략이자 자랑거리다.

영화 ‘오디세이’에서 트로이 목마 사건은 3번 다뤄진다. 원전과의 결정적 차이는 세 번째 장면이다. 이타카로 귀환한 오디세우스(맷 데이먼)는 페넬로페(앤 헤서웨이)에게 트로이 전쟁을 설명한다. 승리의 고양감 같은 건 없다. 대신 오디세우스의 마음에 가득 찬 건 자신의 행위에 대한 회한이다. 목마를 선물로 위장해 트로이를 속였고, 이는 환대(크세니아)라는 ‘제우스의 법’을 어긴 것이라고 오디세우스는 회고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트로이에서 승리의 포효가 아니라 살육의 선혈(鮮血)이다.

영화 ‘오디세이’에서 그리스군이 트로이 목마 작전을 통해 트로이 내부로 진입해 공격하는 모습.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귀환의 시작점이었던 트로이 목마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에, 이후 10년간 귀환 여정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오뒷세이아』가 모험담이라면, ‘오디세이’는 자신의 죄를 깨닫는 여정이다.


②죄의식의 여정


이에 따라 오디세우스를 향한 칼립소(샤를리즈 테론)의 요청도 달라진다. 원전에서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하는 나머지 그를 섬에 7년간 붙잡아두고 기억을 잃게 하는 로터스 나무를 먹인다. “(이타카를) 잊으라”는 것이다. 반면 영화에선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보내기로 결정한 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그를 보내는 칼립소의 요청은 “(트로이를) 기억하라”다. 원전에서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섬을 떠나는 건 올림포스 신들의 결정이지만, 영화에서 출항의 계기는 자각이다.

놀런은 원전과 달라진 인물을 통해 오디세우스 여정에서 죄책감을 드러낸다.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시논은 『오뒷세이아』에 없다. 이탈리아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등장하는 그리스 병사가 시논이다. 그는 목마가 속임수라는 걸 알고 트로이를 속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논은 목마가 정말 제물인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죽임을 당한다. 완벽한 작전을 위해 오디세우스가 시논을 속인 것이다. 시논은 망자의 해변에서 원혼으로 등장해 오디세우스를 원망한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관객 수 100만명을 돌파한 가운데 관련 도서 판매도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9일 교보문고를 찾은 시민들이 관련 서적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아테나는 원전에서 주로 멘토르로 외모를 바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돕는다. 반면 영화에선 오디세우스가 괴로울 때 환영처럼 등장한다. 그리스군이 트로이의 아테나 신전에서 목을 벤 사제의 모습이다. 영화 속 아테나(젠데이아 콜먼)는 신이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죄의식 그 자체다.


③다시 시작된 여행


그런 여정을 거쳐 돌아온 이타카는 과거의 그곳이 아니다. 108명의 구혼자들이 점령하고 이미 ‘제우스의 법’이 무너진 곳. 오디세우스는 그들을 처단한다.

『오뒷세이아』 마지막 장면은 아테나의 “멈춰라, 그만둬라, 대등한 전쟁의 다툼을”이라는 종전 선언이다. 오디세우스는 복종했고, 평화가 찾아왔고, 그는 다시 왕권을 되찾는다. 반면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왕위를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에게 넘긴다. 그리고 전쟁에서 잃은 동료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페넬로페와 서쪽으로 떠난다. 결국 원전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라면, 영화는 자신의 새로운 임무를 깨닫는 이야기다. 『오뒷세이아』가 수평적 귀환의 서사라면, ‘오디세이’는 수직적 성장의 서사라고 요약하는 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영화 ‘오디세이’에서 트로이군이 그리스군이 안에 들어 있는 목마를 끌고 가는 모습.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놀런의 각색은 근대적이다. 문학 비평가 게오르크 루카치는 고대 서사시와 비교한 근대 소설의 특징을 ‘(돌아갈) 선험적 고향의 상실’로 설명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나온 『소설의 이론』(1916)에서다. 근대 소설 속 인물들은 방황하거나 다시 떠났다. 기존 질서가 무너진 시대였다. 지금 트럼프의 미국과 세계 질서도 그렇다. ‘제우스의 법’이 무너진 시대다. 세계 경찰의 부재(‘다크나이트’), 자본주의 불안(‘다크나이트 라이즈’), 불가역적 세계(‘오펜하이머’) 등 9·11 이후의 세계 모습을 근심했던 놀런의 시선은 고대 서사시를 빌렸지만 여전히 현재를 향해 있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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