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보고 딱 한 번 눈물이 났던 순간

최수안 2026. 8. 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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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한다.

한편, 19세기 화가들이 <오디세이아>에서 거듭 그린 장면들은 따로 있다.

놀런은 농담처럼 "개를 키우게 됐고, 그다음 <오디세이>를 만들기로 했다. 궁극의 개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곧 아르고스가 이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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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와 화가들이 그린 오디세우스의 귀환

[최수안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한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다. 나는 이 영화를 무척 기다렸다. 이 작품은 전편을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최초의 장편 영화로 소개됐다. 그렇다면 아이맥스로 봐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며칠 동안 취소표가 나기를 들여다봤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
주말인데 회사에 나와 일을 한 날이었다. 덥고, 휴가철이고, 괜히 딴청을 부리고 싶었다. 건물 바로 앞에는 얼마 전 리뉴얼해서 문을 연 극장이 있었다. 영화관 앱을 켰다가 리클라이너관에 마침 한 자리가 난 것을 봤다.

늙은 개 한 마리
 <오디세이> 스틸
ⓒ UPI 코리아
결국 표를 끊었다. 가장 좋은 화면을 포기하고 가장 편한 의자를 택한 셈이다. 세 시간 뒤 극장을 나오며 알았다. 영화 내내 압도당했는데 정작 눈물이 난 건 딱 한 번이었다는 걸. 스무 해를 기다린 늙은 개 한 마리 때문이었다.

영화 초반, 해안가에 트로이의 목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에는 오디세우스와 그리스 병사들이 숨어 있다. 누구나 결말을 아는 이야기인데도 목마가 해변을 차지하는 순간부터 긴장이 생긴다. 사람이 만든 전쟁의 계략이 사람보다 훨씬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다.

바다로 나가면 화면은 더 커진다. 포세이돈의 분노를 등에 지고도 기어이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배들. 신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인간들은 뱃머리를 돌리지 않는다. 글로 읽을 때는 몰랐다. 화면으로 보고 나서야 '귀환'이라는 말이 이토록 무모한 것이었나 싶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이런 영화가 또 나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화면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무로 만든 배는 정말 무거워 보이고, 바다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처럼 보인다. 신과 괴물이 등장하는 신화인데도 이상하게 모든 것이 현실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바람에 젖고, 파도에 얻어맞고, 오래 걷고, 늙어간다.

놀런은 시간을 다루어온 감독이다. <메멘토>에서는 시간을 뒤집었고, <덩케르크>에서는 길이가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간을 겹쳐 놓았으며, <인터스텔라>에서는 같은 한 시간이 전혀 다른 길이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런 감독이 이번에는 스무 해의 부재와 기다림을 다룬 이야기를 골랐다.

<오디세이> 역시 시간을 곧게 펼쳐 놓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기억이 끼어든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접혀도 모든 갈래는 결국 한 곳으로 향한다. 집이다. 영화의 원작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서사시는 이상할 만큼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기다려야 한다.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고, 신의 노여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견뎌야 한다. 트리나키아 섬에 발이 묶인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은 결국 그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다. 한 달 가까이 섬을 떠나지 못한 끝에 식량이 바닥나자, 오디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금지된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먹는다.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이미 들었지만 굶주림 앞에서 금기를 어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괴물과 바다를 통과하고도, 정작 기다려야 할 순간에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결국 오디세우스를 제외한 선원들은 모두 귀환하지 못한다.

오디세우스가 지나온 그 바다를 그린 화가가 터너다.
▲ J.M.W. 터너, <폴리페모스를 조롱하는 오디세우스> (1829),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도메인
서사시에서 가장 유명한 괴물 가운데 하나를 그리면서 터너는 독특한 선택을 한다. 정작 괴물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꾀에 의해 눈이 멀어 울부짖는 폴리페모스는 산인지 구름인지 모를 희미한 덩어리로 뒤편에 뭉개져 있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배를 집어삼킬 듯 터져 오르는 아침 햇빛이다.
거대한 괴물을 그리겠다고 나서서 정작 그 주인공을 지워버린 그림이다. 놀런의 괴물들도 오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여주지 않을수록 공포와 압도감이 더 커진다는 것을 터너와 놀런 모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19세기 화가들이 <오디세이아>에서 거듭 그린 장면들은 따로 있다. 키르케, 칼립소, 세이렌. 오디세우스를 붙잡고 유혹하는 장면들이다.
▲ J.W. 워터하우스, <유리시스에게 잔을 건네는 키르케>(1891), 갤러리 올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워터하우스의 <오디세우스에게 잔을 건네는 키르케>(1891)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화면의 주인은 정면을 바라보며 잔을 내미는 키르케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의 뒤쪽 거울에 흐릿하게 비쳐 있을 뿐이다.

전쟁과 표류가 바꾼 얼굴

영화 <오디세이>에서는 오디세우스를 화면 한복판에 세우고, 스무 해를 그 얼굴 하나에 싣는다. 맷 데이먼이 그 얼굴을 맡았다. 너무나 훌륭했다. 흘러간 오디세우스의 세월이 대사나 자막이 아니라 얼굴에 들어 있다. 트로이에서의 오디세우스와 이타카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같은 배우인데도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전쟁과 표류가 얼굴을 바꾸어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낯선 얼굴 안에서 예전의 사람이 보인다. 관객은 그를 알고 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거지 행색으로 돌아온 왕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아르고스가 나온다. 20년 만에 돌아온 주인 앞에서 아르고스는 노새와 소의 거름이 쌓인 곳에 힘없이 누워 있다. 한때 뛰어난 사냥개였지만 늙고 방치되어, 이제는 주인에게 다가갈 힘조차 없다.

그래도 주인을 알아본다. 꼬리를 흔들고 귀를 뒤로 젖힌다. 그리고 아르고스는 죽는다. 스무 해 만에 주인을 본 뒤였다. 늙은 유모 에우리클레이아가 오디세우스의 발을 씻기다 흉터를 발견하는 순간도 있다.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주인을 그녀는 얼굴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로 알아본다. 그런데 아르고스에게는 흉터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놀런은 아르고스 장면을 조금 바꾼다. 원전에서 텔레마코스는 이미 아버지와 재회한 뒤이고, 아르고스가 오디세우스를 알아보는 순간에는 그 자리에 없다. 영화에서는 텔레마코스가 그 순간을 지켜본다. 늙은 개가 남루한 노인을 알아보고 희미하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그 남자가 누구인지 깨닫는다. 원전에서 아르고스의 알아봄은 둘만의 일이었다.

놀런은 그 알아봄에 증인을 세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오디세우스의 정체를 증명하는 것이 그의 얼굴도, 이름도, 무기도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한 남자를 늙은 개가 먼저 알아본다. 영웅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존재가 영웅보다 훨씬 작고 늙고 힘없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울었다. 사이클롭스 앞에서도, 바다가 배를 삼킬 때도 울지 않았는데 아르고스가 마지막 힘으로 꼬리를 흔들 때 울었다.

놀런은 지난 2026년 7월 <가디언> 인터뷰에서 아르고스에 대해 언급했다. 어린 시절에도 개를 키우지 않았고, 자녀들이 어릴 때는 가족이 너무 자주 여행을 떠나 개를 들이지 못했다고 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모두 집을 떠난 뒤 아내이자 제작자인 에마 토머스와 처음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놀런은 농담처럼 "개를 키우게 됐고, 그다음 <오디세이>를 만들기로 했다. 궁극의 개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곧 아르고스가 이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이상한 것은 이토록 강렬한 장면이 <오디세이아>를 다룬 미술에서는 상대적으로 드물다는 사실이다. 키르케와 세이렌은 수없이 그려졌다. 아름다운 몸, 마법, 유혹, 영웅의 위기는 커다란 화폭에 잘 어울렸다. 17세기 테오도르 판 튈던의 판화에도 이 장면이 등장하고, 18세기 말 존 플랙스먼이 구상한 <오디세이아> 삽화에도 남아 있다. 하지만 다른 유명한 장면들과 비교하면 아르고스는 회화의 중심보다는 판화와 삽화 같은 작은 화면에서 더 자주 만난다.

1793년 로마에서 출판된 호메로스 삽화집도 그 흐름에 있다. 조각가 존 플랙스먼이 구상하고 토마소 피롤리가 판화로 옮겼다. 명암을 거의 걷어낸 간결한 윤곽선이 고대 그리스 도기를 떠올리게 한다.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는 플랙스먼의 원안을 바탕으로 피롤리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판화가 남아 있다. 제목은 간결하다. <오디세우스의 개가 죽다>.
▲ 토마소 피롤리(추정), <오디세우스의 개가 죽다>, 1795-1816 존 플랙스먼의 원안을 바탕으로 한 에칭·동판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 퍼블릭 도메인
3시간 가까운 영화에 모두 담은 것

브리턴 리비에르도 이 장면을 <율리시스와 아르고스>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율리시스(Ulysses)'는 오디세우스의 라틴어식 이름이다. 누더기를 걸친 남자가 풀이 무성한 난간에 서서 바다를 등지고 있다. 그의 발치에는 늙고 야윈 개가 누워 있다. 개는 힘겹게 고개를 들고 남자를 바라보고, 남자는 그런 개를 내려다본다.

대영박물관에는 이 작품을 바탕으로 프레더릭 스택풀이 1885년에 제작한 판화가 남아 있다. 동물 그림으로 이름을 얻었던 리비에르가 <오디세이아>에서 고른 것은 사이클롭스도, 세이렌도, 신들도 아니었다. 한 인간과 늙은 개가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었다. 원전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아르고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눈물조차 숨긴다.

놀런은 그것마저 바꾼다. 영화의 오디세우스는 늙은 개에게 손을 뻗는다. 이름을 불러주고, 아르고스의 몸에 손을 얹는 그 짧은 동작 때문에 나는 더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화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작다. 개가 주인을 알아본다. 그러나 그 작은 사건 안에 스무 해가 들어 있다.

<오디세이아>는 약 2700년 전의 거대한 이야기다. 전쟁이 있고, 신이 있고, 괴물과 폭풍이 있다. 화가들은 그 방대한 이야기에서 한 장면을 골라야 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곧 그들이 <오디세이아>를 어떻게 읽었는지 보여준다. 터너는 바다와 빛을 골랐다. 워터하우스는 키르케와 세이렌을 골랐다. 그리고 리비에르는 늙은 개를 골랐다.
▲ J.W.워터하우스 <율리시스와 세이렌>(1891)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 퍼블릭 도메인
놀런은 세 시간 가까운 영화 안으로 그 모든 것을 다시 불러들였다. 바다도, 괴물도, 유혹도. 그리고 주인을 기다린 개도. 영화 속의 바다와 괴물의 거대한 스케일에 몇 번이나 나는 압도당했다. 그리고 눈물은 다른 곳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운다. 어떤 사람들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금지된 소를 먹었다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 오디세우스는 20년을 떠돌아 마침내 집에 돌아온다. 영웅은 세상을 한 바퀴 돌아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개는 한자리에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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