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한 입과 끝내주게 어울리는 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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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입추의 찻자리를 위해 선택한 주인공은 대만의 '일월담 홍차(日月潭 紅茶)'입니다.
더위에 한껏 지쳐 널뛰던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입니다.
차를 한 모금 음미한 뒤, 껍질째 무화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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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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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추에 가장 적합한 찻자리를 세팅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기! |
| ⓒ 노시은 |
그런데 달력을 넘기다 잠시 멈칫하게 됩니다. 이 펄펄 끓는 여름의 정점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절기, 바로 '입추(立秋 8월 7일)' 때문입니다. 가을에 들어선다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바깥은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인데 말입니다. 절기와 현실의 이 기막힌 엇박자 속에서, 과연 이 지독한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가을이라는 마법이 오긴 올까 의심마저 듭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끔은 '입추'라는 절기 자체가 누군가 꾸며낸 거대한 음모론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날씨 앱의 시뻘건 온도 그래프를 보고 있으면 '가을'이라는 계절은 그저 팍팍한 현실을 잊기 위해 만들어낸 도시 전설처럼 느껴지거든요. 귓가를 때리는 맹렬한 매미 소리는 여름이 이 땅을 영원히 지배할 거라는 선전포고 같고,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폭염은 가을의 존재를 완벽하게 은폐하기 위한 장막 같습니다.
입추를 마중하다
하지만 저는 24절기라는 오래된 달력 뒤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첩보전을 믿습니다. 자연의 시간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몰래 가을과 밀약을 맺고 있습니다. 피부에 닿는 온도는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지만, 미세하게 달라진 태양의 기울기와 땅속의 기운은 이미 다음 계절을 향한 작전을 시작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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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수 년 동안 홍차만 우린 홍차 전용 자사호가 마침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일월담홍차는 매혹적 붉은 빛이 아름다워 홍옥, 루비라 불린다. |
| ⓒ 노시은 |
바깥의 열기를 완벽하게 차단한 인공적인 서늘함 속에서, 뜨겁고 맑은 찻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느껴지는 그 찌릿한 온기. 그 극명한 온도의 대비가 주는 쾌감은 오직 한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자 호사죠. 서늘한 방 안에서 찻물을 끓이는 다관의 소리가 더욱 경쾌하게 들립니다.
입추의 찻자리를 위해 선택한 주인공은 대만의 '일월담 홍차(日月潭 紅茶)'입니다. 대만의 중심부, 맑고 깊은 산정 호수인 일월담(Sun Moon Lake)의 서늘한 기운을 듬뿍 머금고 자란 찻잎이죠. 일월담 홍차의 붉고 투명한 탕색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찻장을 열어 신중하게 찻잔을 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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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차인 일월담홍차는 정말 무더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뜨거운 바람에 약간의 찬 기운이 묻어날 때 마시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맛을 내준다. |
| ⓒ 노시은 |
조심스레 잔을 들어 향을 맡아봅니다. 폭염의 끈적함을 단숨에 씻어내는 듯한 선선한 바람의 기운. 그 뒤를 이어 짙고 달콤한 꿀향과 잘 익은 과실의 향기가 코끝을 훅 치고 들어옵니다. 한 모금 머금으면 은은한 단맛과 함께 입안이 깔끔하게 정돈되고, 목으로 넘어간 뒤에는 기분 좋은 여운이 길게 맴돕니다. 더위에 한껏 지쳐 널뛰던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이 붉은 일월담 홍차의 곁에는 가을의 첫 수확을 알리는 과일, 무화과(無花果)를 다식으로 곁들였습니다. 꽃이 없는 과일이라는 이름과 달리, 열매 그 자체가 은밀하게 꽃을 품고 있죠. 계절이 극적으로 변하는 입추 무렵에는 몸도 그에 맞는 양생(養生)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동의보감>을 비롯한 여러 한의학 서적에서는 가을철 양생의 최우선 과제로 '윤조(潤燥)'와 '윤폐(潤肺)'를 꼽습니다. 여름내 땀으로 빠져나간 수분을 채워 건조해지기 쉬운 몸을 적셔주고(윤조), 호흡기의 중심인 폐를 촉촉하게 가꿔야(윤폐)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가을의 양생에 무화과는 완벽한 식재료입니다. 수분과 진액을 듬뿍 머금은 제철 무화과는 퍽퍽해진 몸에 윤기를 불어넣어 주죠. 반으로 툭 자른 무화과의 단면은 마치 진귀한 붉은 보석처럼 매혹적입니다. 신비로운 보랏빛 껍질 속에 촘촘하게 박힌 붉은 씨앗들, 그리고 젤리처럼 녹진해 보이는 과육의 질감은 일월담 홍차의 수색과도 기가 막히게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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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콤하고 진득한 과즙으로 가득한 신비한 무화과. 꽃이 없는 과일이라 하지만 실은 열매 그 자체가 꽃인 셈이다. |
| ⓒ 노시은 |
창밖은 여전히 녹아내릴 듯한 8월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지만, 이 서늘한 방 안의 작은 찻자리 위에는 이미 고즈넉한 초가을이 내려앉았습니다. 몸을 채우는 따뜻한 차의 온기와 촉촉한 과일의 단맛을 느끼며, 계절이 보내는 미세한 신호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가을이 절기의 이름으로 어느 날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인내의 시간을 거쳐 우리 몸속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것임을 배웁니다. 지독한 더위 속에서도 뜨거운 입추의 찻자리를 준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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