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비극은 김종서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최경식 2026. 8. 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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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히스토리텔러'입니다.

김종서의 죽음은 곧 단종의 죽음이었다.

만약 김종서가 오래 살아서 단종을 잘 보필하고 단종도 제대로 국정을 운영했다면, 분명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김종서와 단종의 비극적 역사는 단지 비극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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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기자의 히스토리 1]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 그는 누구인가

역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히스토리텔러'입니다. 국내와 해외의 주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기자말>

[최경식 기자]

[기사 보강 : 8월 10일 오전 10시 52분]
▲ 영화 <관상> 스틸컷.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는 다재다능한 천재였다. 김종서의 죽음은 곧 단종의 죽음이자 조선의 퇴행이었다.
ⓒ 쇼박스
"이놈아, 다 죽는다. 김종서가 죽으면 다 죽어. 왕이고 뭐고 다 죽는다." -영화 <관상> 中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역대급 흥행을 기록하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단종의 비극을 보면서 눈물 흘렸고, 엄흥도의 충절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 아울러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악행을 보면서 분노했다.

그런데 영화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김종서다. '백두산 호랑이'로 불렸던 이 사람은, 세종 시대부터 어마어마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수양은 쿠데타 당시 가장 먼저 김종서의 목숨을 노렸다. 다른 곳으로는 부하 장수들을 보냈지만, 김종서를 제거할 때에는 자신이 직접 갔다.

이른바 조선시대판 '참수 작전'까지 불사한 셈이다. 그만큼 김종서가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제거가 쿠데타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김종서를 제거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나머지는 수월하게 풀린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대체 김종서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었길래, 수양은 이토록 집착했던 것일까?

다재다능한 천재

김종서는 북방 개척을 통해 명성을 쌓았다. 그는 6진을개척,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영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여진 세력을 토벌하고 성을 쌓아 주민을 이주시킴으로써 오늘날 한반도 북동부 국경의 기틀을 마련했다.

북방 개척을 통해 김종서는 '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렸다. 김종서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매우 두터웠다. 세종은 병조에 전지를 내려 "함길도의 사변과 방어 등의 모든 일은 반드시 형조판서 김종서와 같이 논의하라"고 할 정도였다.

김종서는 뛰어난 행정가이기도 했다. 군사 작전 뿐 아니라 새로 개척한 지역의 행정 체계를 성공적으로 정비했다. 이를 통해 국방과 지방 행정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유능한 관리로 인정받았다.

김종서는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무인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유학을 두루 섭렵한 훌륭한 문신이었다. 선비들도 김종서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 평가해, 왕에게 그를 영성균관사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영성균관사는 성균관의 운영·관리·학문적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을 말한다.

또한 김종서는 당대 제일가는 역사가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도 김종서였다. 다만 두 역사서에서 김종서의 이름이 삭제됐기에, 그가 편찬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처럼 다재다능한 천재였던 김종서를 세종과 문종은 무척이나 아꼈다. 문종은 죽기 직전에 직접 김종서를 불러 단종의 안위를 부탁하기도 했다. 김종서는 눈물을 흘리며 왕의 고명(유언)을 충실히 받들겠다고 맹세했다.

무한한 충심과 부채 의식 때문이었을까? 김종서는 수양의 최측근인 임어을운에게 철퇴를 맞고도 즉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마에 올랐다. 궁궐로 들어가려 했다. 아마도 피범벅이 된 그의 눈앞엔 자신이 지켜야 할 단종의 얼굴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아울러 단종을 지켜달라고 부탁한 문종과 자신을 끔찍이 아꼈던 세종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쉽사리 죽을 수 없었던 김종서였다. 하지만 역사의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미 궁궐로 진입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차단돼 있었다. 모처에 몸을 숨겼던 김종서는 수양이 급파한 무리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단종의 죽음과 조선의 퇴행

김종서의 죽음은 곧 단종의 죽음이었다. 김종서가 죽음으로써 조선의 모든 권력은 수양에게로 빠르게 넘어갔다. 이전 시대에는 감히 넘볼 수도 없었던 커다란 산이 무너지자, 수양은 거침없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김종서의 보필을 받지 못하는 단종은 '사상누각'과 같은 존재였다. 의지할 곳이 완전히 사라진 왕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냈다. 결국 오래 지나지 않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됐고, <왕사남>에서 본 것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김종서와 단종의 죽음은 조선의 퇴행으로 이어졌다. 세조(수양)는 유교적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공신 세력을 득세시켰다. 과거 태종 이방원은 단호하게 공신 숙청을 단행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세조 시대에 특권을 가진 공신들이 득세해 정국을 좌지우지하면서 조선은 내부로부터 병들어갔다.

만약 김종서가 오래 살아서 단종을 잘 보필하고 단종도 제대로 국정을 운영했다면, 분명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태종-세종-문종-단종으로 이어지는 헌정 질서 위에서 정상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뼈아픈 역사는 언제나 아쉬움을 내포한다. 후대 사람들은 단종과 김종서의 비극, 나아가 조선의 퇴행을 보면서 그러한 느낌을 갖는다. 그러면서 해당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고 올바른 미래로 나아가려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김종서와 단종의 비극적 역사는 단지 비극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발전적인 시사점을 제공하는 유의미한 역사인 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최경식 기자의 브런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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