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배의 이슈진단] 매뉴얼 없는 한국…미국은 ‘투표용지 부족’도 비상사태

김원배 2026. 6. 2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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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례와 비교해 본 투표용지 부족 사태


김원배 논설위원
“모든 선거에서 무언가는 반드시 잘못되기 마련이다.(It is inevitable that something will go wrong in every election.)”

국제민주주의선거지원기구(국제 IDEA)가 2016년에 낸 보고서 ‘선거의 위험 관리’에 나오는 대목이다. 선거는 짧은 기간에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거대하고 복잡한 일이라, 어딘가는 어긋난다. 문제는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 선관위, 용지 인쇄 줄이고도 아무 대비 안 해
중앙선관위원장 상근화, 조직 기강 확립 시급
대규모 임시 인력 지휘통제할 역량 갖춰야
돌발 상황 전제한 위험관리 체계 구축 필요

지난 3일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빚어진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 앞에 시민들이 모여 있다. [연합뉴스]

6·3 지방선거 당일 정오 무렵, 서울 송파구의 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모자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송파구 선관위 직원들은 예비용 무번호 투표용지에 일련번호를 하나하나 손으로 기재하고, 기초의원 선거구별로 7종을 맞추는 작업에 매달렸다. 사무국장까지 이 일을 하면서 위기 대응과 상급기관 보고는 뒤로 밀렸다. 추가 투표용지 역시 봉인되지 않은 종이가방이나 지퍼백에 담겨 전달됐고, 사무보조원·사회복무요원·지방공무원까지 배송에 나서는 등 인수·인계 절차도 무너졌다.

뼈아픈 것은 이런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이 없었다는 점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3일 열린 국회 국정조사 업무보고에서 “투표용지 인쇄 비율을 축소하면서 부족할 수 있다는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해 이에 대비한 세부 매뉴얼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 결과 현장에서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밝혔다. 국제 IDEA는 같은 보고서에서 이런 위험이 현실화되면 민주주의의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위험을 미리 식별하고 조직 차원의 관리 체계를 갖추라고 권고했다. 한국 선관위엔 이런 위험 관리 체계가 없었다.

미국, 투표소 도는 순회요원 배치 권고

김경진 기자

미국 선거지원위원회(EAC)는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주 개표 혼란을 계기로 만들어진 기구다. 각 주와 지방 선거사무소가 참고할 선거관리 지침을 제공한다. EAC의 선거 관리 가이드라인에는 선거의 4대 비상사태를 자연재해·인적재해·사이버기술재해·선거특화재해로 구분했다. 이중 선거특화재해 항목의 맨 앞에 투표용지·물품 부족을 올려놓았다. 가이드라인은 도상 훈련이나 시뮬레이션을 하고 현장에 ‘순회요원’을 둘 것을 권고한다. 선거사무소가 선거일에 지휘센터가 되고, 순회요원이 그 지휘센터와 여러 개 투표소를 돌며 필요한 물품을 전달한다. 당연히 순회요원과 지휘센터 인력 모두 사전 교육을 받아야 한다.

김경진 기자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근본 원인은 투표용지를 적게 인쇄한 것에 있지만 용지를 적절하게 배분하지도 못했다. 문제가 된 송파구의 경우 전체적으로는 4만2000장이 남았다는 게 선관위의 설명이다. 만일 송파구 내의 투표소를 돌면서 지원할 수 있는 미국식 순회요원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누가 갈까 우왕좌왕하지 않았을 것이고, 투표용지를 종이가방이나 지퍼백에 담아 봉인도 하지 않고 운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왜 이런 위기 대응 체제를 갖추지 못했을까. 선거 때 거대한 임시 인력을 모집해 움직이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이를 지휘하는 상설기구다. 선관위를 둘러싼 논쟁은 주로 감사와 견제에 쏠려 있다. 지난해 헌법재판소는 감사원의 선관위 직무감찰을 위헌이라고 판단했고, 외부에서는 이 통제 공백을 문제 삼는다. 선관위에 대한 강도 높은 감사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이것만으론 선거 당일 용지가 떨어진 투표소를 제대로 기능하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송파구에서 투표가 멈춘 것은 누가 선관위를 감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용지를 제때 배분하고 부족할 때 현장이 멈추지 않도록 하는 선거관리 역량의 문제였다.

일방적 공무원 동원 방식은 한계
총선이나 대선, 지방선거는 국가적 이벤트다. 3000여 명 수준의 선관위 직원만으론 대규모 선거를 치를 수 없다. 선거 때마다 지방공무원을 중심으로 40만 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된다. 하지만 선거의 특성상 노동 강도는 높은데 수당이 낮고, 책임도 불분명한 상황에선 지방공무원들이 투·개표 사무를 기피할 수밖에 없다. 이번 6·3 지방선거에 투입된 투·개표 사무원 41만8256명 가운데 공무원·교직원이 아닌 일반 시민이 12만6621명으로 30.3%에 달했다. 게다가 교육은 강제 규정이 아닌 선관위 자체 지침이다. 이 때문에 실무를 처음 맡는 인력이 당일 짧은 교육만 받고 투입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훈련되지 않은 선거관리 인력의 실수는 큰 의혹으로 번지기도 한다. 2020년 총선 당시 인천 연수을 선거구의 이른바 ‘일장기 투표지’ 294장은 날인을 맡은 임시사무원이 도장을 잘못 찍으면서 발생했다.

2022년 11월 한국정당학회가 중앙선관위에 제출한 ‘안정적 선거관리를 위한 선거관리제도 개선방안 연구’ 용역보고서(연구책임 조영호 서강대 교수)는 “권위주의 시대에 확립된 관 주도-관 동원-관 의존형 선거 모델은 일선 현장에서 한계와 위기에 봉착했다”며 “현재의 선거 하부구조는 지속가능하지 못하다”고 진단했다.

이런 선거 관리의 실패는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 2021년 베를린은 연방의회·주의회·구의회 선거와 주민투표를 한꺼번에 치르다 용지 부족과 잘못된 용지 교부로 대혼란을 겪었다. 선거 결과를 둘러싼 소송이 이어지자 베를린주는 전문가위원회를 꾸려 원인을 조사했고, 이듬해 나온 보고서는 사태를 선거 조작이 아니라 조직과 행정의 실패로 규정했다. 위원회는 3만8000여 명의 선거종사자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이들의 헌신이 더 큰 혼란을 막았다고 봤다. 대신 보고 의무와 표준 지침을 확립하고, 투표소 규모와 기표대 수를 예상 유권자 수에 따라 정하도록 권고했다.

호주에선 상자 분실이 재선거로 이어져
호주에서도 허술한 투표지 관리로 재선거가 치러졌다. 2013년 서(西)호주 연방상원의원 선거에서 의석의 향방을 가른 표차는 박빙이었는데, 재검표 과정에서 투표지 1370장이 분실된 사실이 드러났다. 호주선거관리위원회가 위촉한 믹 킬티 전 연방경찰청장의 조사는 충격적이었다. 사용·미사용 투표용지 상자와 폐기물이 적재장에 뒤섞여 있었고, 일부 투표지는 폐쇄회로TV도 없는 곳에서 경비원 한 명의 관리 아래 밤새 방치됐다. 킬티 보고서는 작은 실수와 거대한 결과의 비대칭을 이렇게 경고했다. “법원이 재선거를 명하면, 시가로 고작 30호주달러 남짓한 투표지 한 상자의 분실이 1300만 호주달러라는 대가로 이어질 수 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호주 법원이 재선거를 명령하면서 2014년 4월 선거를 다시 치렀고, 2300만 호주달러(당시 환율로 약 220억원)가 들었다. 호주 선관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모든 투표지는 파기 때까지 행방을 알 수 있어야 하고, 중고 상자 재사용을 금지하며 하청업체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김경진 기자

중앙선관위도 이번 국정조사를 계기로 개선 방향을 내놓았다. 전국의 투표 상황을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투표관리종합시스템을 구축하고, 위기 상황을 반영한 매뉴얼 정비와 대응 훈련을 병행하며, 구·시·군 선관위가 현장 투개표 관리에 집중하도록 조직 구조를 재설계하고, 선거일 전 10일부터 중앙선관위와 행정안전부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가동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사실 투표용지 부족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2022년 지방선거와 2024년 총선, 지난해 대선에서도 일부 투표소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지난해 12월 선관위는 ‘대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꾸려 권고안을 받고도 불과 반년 만에 대형 사고를 냈다. 당시 위원장을 맡았던 장영수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쯤 되면 몰라서 못 한다기보다 구조적인 기강 해이가 만연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질타했다. 장 교수는 “중앙선관위원장과 위원을 상근직으로 바꿔 앞으로 2년 동안 큰 선거가 없는 시기에 조직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교육과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기강 해이의 뿌리를 조직 구조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 진상규명위원(선관위 위촉)으로 참여한 한의석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법원 조직을 닮은 선관위의 수평적·분권적 구조와 위원회·사무처의 이원화가 지휘와 책임을 불분명하게 한다”고 진단했다. 위기 상황에서 누가 판단하고 책임지는지가 흐릿하면, 송파구처럼 현장이 멈춰도 윗선이 한참 뒤에야 사태를 파악하게 된다. 한 교수는 “선관위 인력을 무턱대고 늘리기보다 선거사무에 참여하는 지방공무원의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제안했다. 흐릿한 지휘 체계를 거점으로 모으자는 제안도 나온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선거는 짧은 기간에 행정수요가 폭발하는 특성이 있는데 현장에서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대응할 인력이 너무 부족했다”며 “너무 작게 쪼개진 하부 선관위를 통합해 광역거점 선관위로 재편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관위 개혁은 이제 시작이다. 정치권 등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외부 통제를 강화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무언가 잘못되더라도 현장은 멈추지 않도록 지휘 체계와 인력 운영, 내부 교육시스템까지 함께 바꿔야 한다.

김원배 논설위원 oneb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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