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한국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김영근 2026. 6. 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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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욱 스탠퍼드 석좌교수의 '각자도생' 진단… 동맹·중국·북핵·인재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어야

[김영근 기자]

 2026년 6월 23일 세계경제연구원 웨비나에서 신기욱 스탠퍼드대 석좌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자료=IGE 웨비나 화면 갈무리.
ⓒ 김영근
2026년 6월 23일 오후 3시, 세계경제연구원(IGE) 웨비나의 줌 화면이 몇 차례 멈췄다. 안식년 중 독일에서 접속한 신기욱 스탠퍼드대 석좌교수의 목소리가 끊기자 진행자인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제조업 강국 독일의 통신 사정이 뜻밖이라며 웃었다. 잠깐의 해프닝이었지만 이날 강연의 주제와 묘하게 겹쳤다. 한때 견고해 보이던 제도와 산업도 어느 순간 약한 고리를 드러낸다.

화면이 다시 살아난 뒤 신 교수는 국제질서를 "혼돈과 각자도생의 시대"로 규정했다. 국가 간 협력과 갈등이 사안별로 뒤섞이고, 안보와 경제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진단이다. 반도체, 인공지능, 공급망, 인재가 이제 산업정책만의 언어가 아니라 외교안보의 언어가 됐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 공식도 더는 그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날 발언만 떼어 놓으면 또 하나의 국제정세 강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신 교수의 연구 이력을 따라가면 메시지는 더 입체적으로 읽힌다. 그는 현재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윌리엄 J. 페리 현대한국학 석좌교수이며, 2001년 '한국학프로그램'을 기안하고 진행 중에 있다. 2005년부터 2025년까지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를 이끌었고, 지금은 한국·대만 프로그램과 넥스트아시아정책연구실을 맡고 있다. 스탠퍼드 공식 프로필에 따르면 저서와 편저는 27권이다.

학자로서의 업적도 크지만, 연구를 정책대화로 연결하는 장을 꾸준히 만든 점이 눈에 띈다. 민족주의에서 시작해 한미동맹, 민주주의, 북한, 이민과 인재까지 연구 주제가 넓어졌지만 질문은 한결같다. 외부 질서가 흔들릴 때 한국 사회는 어떤 내부 역량으로 버틸 것인가.

같은 동맹, 다른 계산서

2010년 저서 < One Alliance, Two Lenses >에서 신 교수는 한미동맹을 '하나의 동맹을 보는 두 개의 렌즈'로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동맹이 국가 정체성과 결부된 문제지만, 미국에서는 여러 정책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감정의 무게와 정책의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날 강연에서 그가 개별 사안은 작아 보여도 수면 아래 쌓이면 동맹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한 대목은 이 연구의 연장선에 있었다. 거창한 공동성명보다 실무채널의 설명, 사전통보, 오해를 줄이는 소통이 신뢰를 지킨다는 얘기다.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동맹은 한 번 맺은 계약이 아니라 매일 갱신하는 관계라는 현실론에 가깝다.

그가 주문한 것은 맹목적 추종이 아니었다. 미국의 빅테크와 한국의 제조 역량을 결합하면 반도체와 피지컬 AI에서 한국이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가 한국 첨단산업에 시간을 벌어주는 효과도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자동차·반도체를 갖춘 한국이 미국 제조업 재편에서 드문 파트너라는 판단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대목에서 경계가 나왔다.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기술 생태계에만 들어갈 때 한국의 장기 선택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 플랫폼이 시장을 열어 주는 동시에 콘텐츠와 수익 구조를 종속시킬 수 있다는 사례도 들었다. 동맹을 강화하되 기술 주권과 협상력을 통째로 넘기지 말라는 뜻으로 읽혔다. 이 양면성이야말로 단순한 '미국 편에 서라'는 구호와 그의 주장을 가르는 지점이다.

'안미경중' 이후, 중국은 끊는 대상인가

강연을 들으며 질문은 한 곳으로 모였다. 한국이 반도체·AI·공급망에서 미국과 공조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하루아침에 끊을 수 없다면, 대중 전략은 단계적 이탈인가, 선택적 협력인가. 남북관계가 막힌 상황에서 중국의 역할까지 생각하면 더 피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신 교수의 답은 강연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전면 이탈보다 분야별 재배치에 가깝다. 첨단기술과 경제안보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되, 관광·소비재·일부 제조업처럼 안보 민감도가 낮고 공급망 분리가 어려운 영역에서는 중국과 협력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지난 3월 언론 인터뷰에서도 그는 안미경중의 종료를 '모든 경제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더 세밀한 구분의 시작으로 설명했다.

다만 선택적 협력은 모호성의 다른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기술을 지킬지, 어느 공급망까지 공동관리할지, 중국 시장에서 얻는 이익과 정치적 비용을 어떻게 계산할지 기준이 먼저 있어야 한다. 기준 없이 사안마다 흔들리면 미국에는 불신을, 중국에는 압박의 빌미를 줄 수 있다. 신 교수가 말한 '치밀한 전략'은 진영 선택보다 이런 기준표를 만드는 일에 가깝다.
 질의응답에서 신기욱 교수가 한미동맹과 중국·북한 문제에 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자료=IGE 웨비나 화면 갈무리.
ⓒ 김영근
비핵화에서 '핵을 가진 북한과 사는 법'으로

북한 대목에서는 질문 자체를 바꾸자고 했다. "어떻게 핵을 없앨 것인가"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핵을 가진 북한과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것인가"를 정책 의제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북한을 법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말이라기보다, 비핵화 목표와 별개로 억제와 위기관리의 현실을 설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2021년 공편한 < The North Korean Conundrum >에서 그는 핵안보와 인권을 제로섬으로 다루지 말자고 했다. 핵 문제를 앞세워 인권을 지우거나, 인권을 말한다며 안보 현실을 외면해서는 정책이 지속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이번 강연에서도 원론과 현실을 분리하지 않았다. 비핵화 원칙을 유지하더라도 확장억제, 자주국방, 위기 소통, 인권을 한 틀에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대만 해협과 북한 변수가 동시에 움직일 가능성도 외면하지 말라고 했다. 실제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발생 가능성을 0으로 놓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희망에 가깝다. 쉬운 해법을 내놓기보다 잘못된 질문이 정책을 얼마나 오래 제자리걸음하게 하는지 지적한 셈이다.

외교의 기저(바탕)에는 국내 정치가 있다

신 교수의 연구에서 외교와 국내 정치는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2022년 김호기 교수와 공편한 <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 >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포퓰리즘, 양극화, 사법·시민사회의 정치화, 불평등과 정보환경의 변화로 추적했다. 2024년 비상계엄 사태 뒤에는 제도가 위기를 막아낸 회복력과 깊어진 불신을 함께 짚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가 되라는 주문은 외교부만의 숙제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외전략이 급회전하고, 국내 갈등이 안보 사안까지 진영 논리로 끌고 들어가면 상대국은 한국의 약속이 얼마나 지속될지 의심한다. 외교의 일관성은 국내 제도의 예측 가능성에서 나온다. 이날 강연이 동맹과 산업을 말하면서도 교육과 이민, 정치적 안정으로 옮겨간 이유다.

강연 후반부의 화두는 '정점에 오른 한국'이었다. 반도체와 문화산업이 세계적 성과를 내고 있지만, 호황이 영구적이라고 믿는 순간 정점은 하강의 출발점이 된다. 미국이 언제까지 한국산 메모리에 의존할지, AI 투자 열기가 꺾일 때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 플랫폼 의존 속에서 한국 콘텐츠의 몫을 지킬 수 있을지를 물었다.

신 교수는 지금의 초호황을 분배 논쟁만으로 소진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미국이 자국 기업과 생산기반을 키우면 한국의 독점적 지위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벌어들인 이익을 연구개발과 다음 세대 산업에 재투자할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경고였다. '코리아 피크'는 한국이 이미 쇠퇴한다는 단정이 아니라, 성공이 다음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질문이다.

이 문제는 그의 최근 인재 연구와 맞닿아 있다. 신 교수는 2025년 인재 전략 비교 연구서 < The Four Talent Giants >와 2026년 글에서 인재를 국내에서 길러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해외 인재 유치, 두뇌 순환, 해외 네트워크 활용을 함께 조정하는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날도 저출생과 고령화 속에서 이민은 피하기 어려운 과제가 될 수 있으며, 사회적 충돌이 커지기 전에 제도와 교육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의 연구가 하나로 모인다. 동맹은 선언보다 신뢰의 축적이고, 민주주의는 선거보다 제도의 신뢰이며, 산업 경쟁력은 일시적 호황보다 인재의 재생산 능력이다. 외교전략도 국내 정치와 교육, 이민, 연구 생태계가 받쳐주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었다. 어느 분야에서 누구와 협력하고, 무엇은 국내에 남기며, 어떤 위험은 스스로 감당할지 정하는 국가 전략의 설계도였다. 각자도생은 혼자 살아남으라는 말이 아니다. 선택의 비용을 남이 대신 계산해주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경고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말이 '이재명믹스'다. 이는 신기욱 교수가 사용한 표현이 아니라, 그의 진단을 현 정부의 정책 언어로 옮겨 붙인 이름이다. 특정 사업을 포장하는 구호가 아니라 한미동맹, 대중국 관계, 반도체·인공지능·제조업, 공급망, 인재 정책을 하나로 묶는 국가전략의 조합이어야 한다. 미국에는 신뢰할 수 있는 기술·제조 협력자로 자리 잡되, 중국과는 전략산업의 의존도를 낮추면서도 필요한 경제협력은 유지하는 현실적 구상이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도 이런 선택과 조정 능력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문제는 정책이 부처별로 흩어질 때다. 외교는 동맹만 말하고, 산업정책은 투자 유치에 머물며, 교육정책은 부족한 인재를 뒤늦게 채우는 방식으로는 '각자도생'의 지경학을 견디기 어렵다. 이재명믹스가 실질을 가지려면 외교·안보와 산업·기술, 고등교육과 이민정책을 함께 설계하고 조정하는 국가 차원의 실행 체계가 뒤따라야 한다. 동맹과 자율, 성장과 지속가능성, 중국과의 경쟁과 협력을 사안별로 구분하면서도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혼돈의 시대에 요구되는 이재명믹스의 내용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현재 도쿄대학교에서 연구년을 수행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도쿄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취득한 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및 계명대학교 일본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AI시대의 안전경제학: 글로벌 불확실성 및 위기관리" 및 "북핵 리스크 관리와 국제안보레짐의 변용", 『포스트 제국주의』(공저), 『한일관계사 1965-2015. II: 경제』(공저), 『한일 관계의 긴장과 화해』(편저)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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