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선관위의 존재감 변천사

정승훈 2026. 6. 1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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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훈 논설위원

오랜 기간 주목받지 않던 기관이
채용 비리 불거지며 위상 확인돼

선거관리 조직이 참정권 훼손한
투표용지 부족은 중차대한 문제

헌법기관 박탈은 신중하게 접근
행정부보다는 국회가 견제해야

처음 참정권을 행사했던 1991년은 선거와 관련된 일들이 많았다. 3월에 기초의원 선거, 6월에 광역의원 선거가 치러졌는데 투표보다는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이 더 기억에 남았다. 학생회 차원에서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역할이었는데 금권·관권 선거를 막자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거나 ‘이런 사람은 뽑지 맙시다’라는 제목의 스티커를 전봇대 등에 붙이기도 했다. 활동 중 가장 긴장됐던 건 심야시간에 이뤄진 금품살포 현장 잡기였다. 지역을 나눠 순찰하다 의심가는 현장을 목격하면 즉각 감시단 사무실로 연락하는 임무였다. 사무실에선 금품살포를 목격하더라도 현장에서 개입하거나 당사자와 싸우면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선거 전 이틀 정도의 야간 순찰에서 금품살포 현장을 적발하진 못했고, 긴장감 속에서 어두운 밤 골목길을 다녔던 기억만 생생하다.

생애 첫 선거 과정에서 선거관리위원회라는 이름을 떠올린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해 2월 시민·종교단체 9곳이 모여 서울 YMCA회관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했던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 대한 인상은 선명하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던 이듬해 가입 시민단체를 57개로 늘린 공선협은 총선 직전 군부재자 투표 부정을 폭로하는 이지문 중위의 기자회견을 개최하면서 이름을 제대로 알렸다. 공선협은 선거 부정행위 감시·고발은 물론 유권자에게 투표 참여를 촉구하고, 각 정당에 정책 위주 선거운동을 요청하는 등 선거문화 개선에도 앞장섰다. 선관위의 존재에 대해 처음 생각해본 건 공선협의 맹활약 덕분이었다. 선거 부정행위 감시나 선거문화 개선 운동은 선관위가 해야 하는 역할 아닐까.

존재감 없는 기관으로 생각했던 선관위가 엄청난 곳이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2023년 5월 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 자녀가 경력 채용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선관위는 특별감사를 진행한 뒤 4명을 수사 의뢰하고 가족 채용 전수조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미진하다는 여론이 높았고 이에 감사원이 감사에 착수하겠다고 하자 선관위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이 사건에서 선관위는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선거관리의 성격상 행정작용에 해당한다고 해도 선관위를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설치한 만큼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채용 비리를 통해 헌법기관의 위상을 과시했던 선관위가 이달 들어 더 큰 사고를 쳤다. 6·3 지방선거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이전의 그 어떤 잘못보다 중차대한 문제다. 선거 관리를 위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국민의 참정권을 훼손한 것은 스스로 존재의 목적을 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민이 투표할 권리조차 박탈했다는 점 때문에 대학가 등에선 ‘공정’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분노하고 있다. 선관위의 헌법기관 지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선관위의 행태에 대한 제재·견제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헌법기관 지위 박탈 문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선관위의 헌법기관 지위를 없애 행정부의 일원이 되면 여당에 유리하게 선거 관리를 한다는 의심을 받아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선관위가 감사원 감사를 받게 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다. 헌법 개정이 필요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선관위가 행정부의 입김에 휘둘리는 걸 피하긴 어렵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선관위를 좌지우지하려는 권력의 기본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행정부보다는 국회의 견제가 합리적이다. 국회에 선관위에 대한 감사·조사 기능을 갖춘 위원회를 두고 여야 위원이 동수로 참여하되 위원장은 야당몫 국회 부의장이 맡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관위는 본연의 역할로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어렵다. 어쩌면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조직이다. 선거가 없을 땐 말할 것도 없고, 선거가 있을 때도 잡음 없이 마무리되게 하는 게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국민들에게 선관위의 존재감은 묵직하게 다가온다. 자업자득이다. 선관위가 다시 존재감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조직으로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꽤 큰 변화를 감당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승훈 논설위원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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