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시계 늦추려다 구조조정 재촉한다 [더롱뷰]
한국에서 직장인이라면 보통 두 개의 시계를 본다. 다들 똑같이 보는 정년의 시계, 그리고 인사부에서 돌아가는 구조조정의 시계다. 법정 정년이 60세에서 65세로 높아지면 직장인의 퇴직 시계도 그만큼 늦춰질까.
사실 한국에서 퇴직이란 쉼표가 아니라 불안한 노동의 시작에 가깝다. 국민연금을 받기도 전에 먼저 정년을 맞이하는 탓에 퇴직 후 몇 년간 소득 공백이 발생한다. 많은 이들이 생계를 위해 다시 노동시장으로 향한다. 국가데이터처의 고령층(55~79세) 부가조사를 보면, 퇴직 후에도 일하기를 희망하는 고령층의 비율은 2018년 64.1%에서 지난해 69.4%로 높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유효 은퇴연령은 남성 67.4세, 여성 69.6세다. OECD 최고 수준이다. 급속한 고령화와 불안한 노후, 그리고 인구 절벽 앞에서 노동계는 정년 연장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기업의 입장은 좀 엇갈린다. 숙련이 중시되는 조선·철강 등 제조업 현장에선 반가운 해법일 수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에 따라 고숙련 블루칼라가 귀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건비 추가 부담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그 이상으로 무겁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 임원은 이렇게 말한다. “50대 한 명에 들어가는 고정비용이면 신입사원 3명을 뽑을 수 있다. 숙련도를 무시할 순 없지만 이 압도적인 비용 차이를 생각하면 신입을 가르쳐 키우는 게 기업에겐 남는 장사 아닌가.”

냉담한 반응의 이면엔 연공서열에 따른 호봉제(연공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근속 연수가 쌓일수록 임금이 연동돼 오르는 구조다. 호봉제의 임금 커브는 생산성과는 다른 곡선을 그린다. 대체로 젊을 땐 생산성이 임금보다 높고, 나이 들어선 임금이 생산성을 앞지르는 구조다〈그림〉.
젊을 때 덜 받고 더 일한 대가를, 나이 들어 돌려받는 셈이다. 직장인으로선 더 받은 잉여분이 덜 받은 손실분과 같거나 커야 합리적이다. 그래야 중간에 직장을 자꾸 옮겨다닐 필요가 없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그걸 전제로 성립한다. 이 같은 지연 보상은 직장인과 기업 사이에 일종의 ‘심리적 계약’이다.
직무급이 도입되고 있다곤 하나, 생산성과 보상이라는 두 커브는 아직 따로 움직인다. 한국의 30년 차 이상 근로자와 1년 차 미만의 임금 격차는 4.39배에 달한다. 1.6배 수준인 유럽 주요국과 비교하면 비정상적일 만큼 높다(한국경제연구원). 이를 그대로 둔 채 정년만 늘리는 건 기업에게 고비용 구조를 떠안으라는 요구다. 기업은 임금 삭감이나 고용 축소로 방어할 수밖에 없다.
55세이던 정년이 2016년부터 60세로 연장됐을 때도 그랬다. 당시 기업들이 도입한 임금피크제가 대표적인 예다. 나가라는 말을 하진 않지만 급여 명세서의 숫자가 먼저 신호를 보낸다. 이를 받아든 근로자들의 반응도 한결같진 않다. 적게 받아도 직장을 다니는 데 감사해하는 이도 있지만, 심리적 계약 위반이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이도 적잖다.
연공서열과 고용 보호의 틀을 그대로 두고 정년만 연장하면, 조직은 숙련뿐 아니라 무능도 함께 축적한다. 조직의 무능화를 설명하는 ‘피터의 법칙(Peter Principle)’에 따르자면 그렇다. 일을 잘하는 사람을 계속 승진시키다 보면 결국 감당 못할 자리까지 올라가고, 그 뒤엔 승진을 멈춘 채 무능한 관리자로 조직 상층부에 머문다는 이론이다. 성과보다 연차로 서열을 정하는 구조에선 무능과 비효율의 체류 기간도 길어진다. 이 역시 기업에겐 큰 추가 비용이다.

실제 퇴직 연령이 법정 정년과 함께 늘어난 것도 아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주된 일자리, 즉 가장 오래 근무한 직장을 떠나는 나이가 지난해 52.9세였다. 7년 전(52.5세)과 별 변화가 없다. 국회미래연구원 정혜윤 부연구위원이 2015년 이후 퇴직한 50대 후반~60대 초반 1640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정년퇴직의 비중은 24.6%로 비자발적 퇴직(34.5%)에 못 미쳤다. 정년은 늘었지만, 기업이 사람을 내보내는 시간표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50대 이상의 자영업자 비율, 비정규직 비중 등을 감안하면 정년 연장의 수혜를 온전히 누릴 대상은 의외로 많지 않다. 베이비부머 중 실질적 수혜자를 11.4%로 추정한 연구(석재은ㆍ이기주, 2016년)도 있다. 결국 혜택은 이미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정규직에게 집중된다. 김덕호 성균관대 교수는 “수혜는 공공기관, 공무원, 그리고 300인 이상 대기업에 근무하는 소수에 돌아간다”고 했다.
국내에서 정년 연장의 모델로 자주 거론되는 건 일본식 해법이다. 일본은 2000년부터 기업에 65세까지의 고령자 고용 확보 조치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했다. 정년을 폐지 또는 65세로 연장하거나, 계약직 등으로 재고용하게 한 것이다. 2023년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69.2%가 재고용 방식을 채택했다. 다만 임금을 삭감(30~50%)하고, 단순 업무를 맡긴다는 점에서 고용의 질은 떨어진다. 어제 결재도장을 찍던 간부가 오늘 콜센터에서 헤드셋을 쓰는 경우도 있다. 연공제 임금을 놔두고 정년만 연장하면 기업이 감당할 수 없기에 나온 타협이다. 이를 정답이라 부르기엔 부족하지만 연착륙엔 의미가 있다. 점진적 임금 조정, 직무와 역할 재설계 등을 통해 적어도 비용 충격을 한 번에 폭발시키진 않았다.

특히 일본에선 정년 연장이 한국처럼 세대 간 일자리 경쟁으로 번지지 않는다. 오히려 저임금으로도 일하려는 고령 노동이 임금 상승의 불씨를 꺼뜨리고 있다는 게 논란거리다. 아베노믹스에 힘입어 2017년 이후 실업률이 완전고용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일본에선 임금과 물가가 오르지 않았다. 고령 근로자층이 ‘저임금 쿠션’으로 기능하며 노동시장에서 임금 상승 압력이 새나간 것이다. 이로 인해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정체돼 민간소비도 힘을 잃었다는 게 중론이다. 수요 확대 정책이 기대했던 임금ㆍ물가의 선순환은 아직 소식이 없다.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운 미국의 경우 법적 정년이 따로 없다. 1986년 연령차별금지법(ADEA) 개정을 통해 나이 많다고 내보내는 것을 인권 침해와 차별로 규정했다. 지금도 백발의 승무원이나 우체부가 현역으로 뛰는 모습을 쉽게 본다. 정년이 없어도 기업이 시니어를 붙잡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의 숙련 가치가 임금보다 높기 때문이다. 내보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성과가 임금을 넘으면 남고, 넘지 못하면 떠난다.
사회보장의 나라 스웨덴에도 강제적인 ‘정년’은 없다. 법적으로는 69세까지 ‘일할 권리’를 보장한다. 하지만 1989년 공공부문을 시작으로 연공급 보수체계를 개인의 실적과 직무에 기반한 임금 구조로 수술했다. 그 결과 스웨덴은 나이와 임금의 연동성이 OECD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고령 근로자를 오래 써도 기업의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뜻이다.

해외 사례가 보여주는 건 명료하다. 정년 연장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전제는 연차가 아니라 생산성을 기반으로 한 임금과 고용, 그리고 해고까지 함께 움직이는 구조다. 핵심은 고용의 유연화다. 반면 한국 노동계는 정년이라는 결과를 더 중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필수적인 임금과 고용의 유연성에 대해선 한 뼘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고용 구조의 변화 없는 정년 연장의 혜택은 소수 고임금 일자리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선점하고 있는 근로자들은 청년층의 노동시장 진입로를 좁히는 셈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민간기업에서 정년 연장의 수혜자가 1명 증가할 때 청년고용은 평균 0.24명 감소한다고 한다. 60~64세 취업자(약 260만 명)의 20%가 정년 연장의 수혜를 본다고 해도, 청년 일자리 12만여 개가 추가로 사라지는 셈이다. 김태기(전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ADR노동연구소장은 “임금과 고용 결정의 관행을 바꾸지 않는 한 정년 연장은 청년층과 시니어 모두를 일자리 불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정년의 시곗바늘을 억지로 늦추다간 구조조정의 초침이 빨라질지 모른다.
서둘러 만든 정책은 졸속으로 흐르기 쉽다. 꼭 미답의 길을 가야겠다면 정부가 고용주로서 먼저 시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 공무원 노조와 합의해 연공제를 직무급제로 전환하고, 정년을 연장 또는 폐지하는 대신, 성과에 따른 급여 조정과 인력 재배치를 실행한다면 기업들이 안 따를 이유가 없다. 보상이 근속연수 대신 직무와 성과에 연동되면 생산성과 동일한 커브를 그리게 된다. 그때가 되면 정년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고령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 오래 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일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고용시장의 상류와 하류 전체를 두루 손보지 않고 시행하는 정년 연장은 머잖아 땜질에 땜질을 더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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