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장대한 분노의 원류와 그 이후

이란 전쟁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은 더 종잡기 어려워졌다. “전쟁이 곧 끝난다”는 희망 섞인 전망을 되풀이하는 사이 “한 문명이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세계 최강국 지도자의 말이라 믿기 힘든, 기복이 심한 말을 어지럽게 쏟아냈다. 전쟁 전 트럼프 대통령의 과장된 어법과는 또 다른 무게로 느껴진 건 그 말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말들에는 생각의 일단(一端)을 가늠할 만한 것들도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반복한 ‘47년’도 그중 하나다. “이란은 47년 동안 미국과 세계를 가지고 놀았다.” “지난 47년 동안 세계에 저지른 일에 비하면 아직 충분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47년 전인 1979년 이란에선 이슬람혁명 후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1월 4일 미국 대사관에 침입한 이란 대학생들은 미국인 52명을 444일간 억류했다. 그 영향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를 하기 전에도 이란에 대한 분노를 여러 번 표출했다. 그는 1980년 TV 인터뷰에서 이란 같은 나라가 인질을 붙잡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며 베트남전 때처럼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1988년 가디언과의 인터뷰는 이란 전쟁 후 발언과 유사하다. 그는 “그들(이란)은 우리를 심리적으로 두들겨 패고, 바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며 이란 핵심 석유 시설 하르그섬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對)이란 작전명 ‘장대한 분노(Epic Fury)’도 그래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 제시된 20개 작전명 후보 중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가 지금 작전명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47년의 분노를 터뜨릴 적임자로, 서사시(Epic) 주인공의 운명에 자신을 포갰을지 모른다. 실제 그는 지난 3월 트루스소셜에 “그들(이란)은 47년간 전 세계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미국 47대 대통령인 내가 그들을 처단하고 있다”며 “그렇게 하는 것은 정말 큰 영광”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분노 서사가 시작되기 전 이란도 오랜 분노로 들끓었다. 1951년 영국이 독점하던 유전을 이란 민주 정권인 모사데크 총리가 국유화하자 영·미 정보당국은 1953년 ‘아약스 작전’으로 명명한 비밀 군사 쿠데타를 기획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팔레비 왕조는 미국 CIA와 이스라엘 모사드의 지원을 받아 비밀경찰조직을 창설하고 반체제 인사를 탄압했다. 이슬람혁명 과정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샤(왕)에게 죽음을’과 나란히 외친 구호가 ‘미국에 죽음을’인 걸 보면 미국을 향한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추정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아약스 작전이 있은 지 47년 만인 2000년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미국이 모사데크 정권 축출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많은 이란인들이 미국의 내정 간섭에 왜 계속 분개하는지 잘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쟁 개전 초기 향후 중동 정세를 전망했던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1차 걸프전은 이 지역의 대규모 미군 주둔으로 끝났다. 미군 주둔에 분노한 오사마 빈 라덴이란 젊은 사우디인은 미국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한 전쟁의 끝은 다음 전쟁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아직 이 전쟁의 마무리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는 건 어렵다. 다만 이제까지 경과만으로도 헤아리기 어려운 분노가 배양될 토대가 당사국들에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눈앞의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는 것 못지않게 그 분노를 가라앉힐 노력들이 더해져야 하는 이유다. 분노에 분노로 맞서는 것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김현길 국제부장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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