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체’, 첫입은 합격점인데… [쿡리뷰]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입은 분명 당기는 맛이다. 그런데 갈수록 질리도록 먹어본 그 맛이다. 진귀하고 신선한 재료발도 듣질 않는다. 다루는 방식이 고루해서인지, 이것저것 다 갖다 쓰다 네 맛도 내 맛도 아니게 된 건지. 안타깝게도 둘 중 무엇을 택해도 오답은 아니다. 실소가 나올 만큼 밍밍한 뒷맛이 씁쓸함까지 남기는 영화 ‘군체’(감독 연상호)다.
‘군체’는 정체불명 감염 사태로 봉쇄된 건물 안 고립된 생존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진화하는 감염자들에 맞서는 이야기다. ‘부산행’, ‘반도’를 잇는 연상호 감독의 새 좀비물이다.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아 프리미어 상영을 진행했고, 21일 국내 개봉했다.
극 초반에는 이름값을 한다는 인상이다. 다짜고짜 생물학적 테러를 선포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서영철(구교환), 성격 차로 이혼한 전 부인 권세정(전지현)을 챙기는 한규성(고수).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지만 배우들의 힘으로 이야기는 어찌어찌 흥미롭게 끌려간다. 주무대는 체인스 바이오 콘퍼런스가 열린 둥우리빌딩이다. 콘퍼런스에서는 ‘집단지성’, ‘의식통합’ 같은 키워드가 등장한다. 이는 이들 앞에 곧 나타날 새 좀비의 특징이다. 실제와 전광판도 구별하지 못하던 사족보행 좀비들은 실시간으로 진화해 나간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하더니 인간의 말과 목소리도 흉내 낸다.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돼 정보를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자체 업데이트를 진행하면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연상호 감독이 현대무용단을 추가로 섭외해 구현한 좀비떼의 움직임은 작품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 동체시력을 시험하듯 네 발로 빠르게 달리다가 정보를 받아들일 땐 일제히 멈춰 서서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은 충격적이라는 말밖엔 설명할 길이 없다. 권세정 무리가 스스로 백신이라 주장하는 서영철을 생포한 뒤 펼쳐지는 엘리베이터 시퀀스 등 개체 수가 많은 신일수록 그 충격은 더 커진다. 이들에게 대응하는 권세정, 최현석(지창욱)의 액션도 잘 맞아떨어져 몰입도를 높인다. 감염자의 기괴한 비주얼은 공포를 배가한다. 통신망 역할을 하는 점액질과 불투명한 눈동자는 마주할 때마다 절로 이맛살을 찌푸리게 된다. 이 지점에서 ‘군체’는 관람이 아닌 체험이다. 순간 극장이라는 사실을 잊었을 정도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좀비 자체에 집중한 영화”라는 연상호 감독의 설명이 맞다. 정작 관객이 자아를 의탁해야 할 인간 캐릭터들이 갖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서영철과 권세정의 악연, 한규성 현 부인 공설희(신현빈)와 전 부인 권세정의 연대 등 주요 관계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은 엉성하다. 아포칼립스물에서 빠질 수 없는 빌런들은 납작하게 묘사되는데 저마다 불필요한 서사를 갖고 있다. 특히 절체절명의 위기 속 학교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전복은 그럴듯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듯하나, 피해자가 좀비가 돼서야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모양새는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 설상가상 대테러 팀장으로 분한 이중옥은 시종일관 붕 뜬다. 개인 역량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대사 모두 이야기 전개를 위해 철저히 소비된다.


연상호 감독의 낭비벽(?)은 곳곳에서 체감할 수 있다. 대테러 팀장을 에워싼 좀비들은 그가 “지X났네”라는 마지막 대사를 뱉을 때까지 숨죽인 채 대기한다. 차로 서영철을 들이받는 데 실패한 권세정은 운전하는 법을 잠시 잊은 듯 빈틈을 내어준다. 특별조사팀을 이끄는 교수(이현균)에겐 자리를 뜨는 공설희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서비스컷이 주어졌다. 서영철과 좀비들은 군체가 된 지 오래인데 권세정에게 사건의 발단을 설명할 때만 노래방마냥 대사 파트를 나눠 가진다. 이러한 컷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군체를 이루며 전반적인 호흡을 늘어뜨린다.
보편성을 대표하는 좀비 집단과 개별성을 상징하는 권세정의 대립은 뻔하다. ‘앤트밀’ 떡밥을 회수하며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수미상관 구조는 진부하다. 아쉬운 코스 요리다. 그럼에도 시도해볼 만은 하다. 매혹적인 첫술을 뜨자마자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22분.
심언경 기자 notglasses@kukinews.com

Copyright © 쿠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